올해로 53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지난 5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7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확장소설’(김태용), ‘살아남은 아이’(조진주) 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김태용 ‘확장소설’
김태용의 ‘확장 소설’(문학과지성사)에선 괴상한 제목이 먼저 눈에 띈다. 뭘 확장하나? 보았더니 본래의 역사 위에다 일어나지 않은 또 하나의 역사를 보태고 있다.
북한이 개방하여 남한의 기자가 평양을 방문하고, 천재 시인 이상은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데, 그걸 보고 달아난 아내 연심이는 훗날 인민 배우가 되는 문예봉을 만난다. 이런 대체 역사 소설들은 흔한 이야기 수법을 거부한다. 지난날을 반성하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다. 그 대신 아예 시간 줄기를 바꿔버린다.
작가가 괜한 실험 취향으로 쓴 건 아니다. 여기에는 현대사회와 인간에 대한 고뇌가 배어들어 있다. 인간의 차원에서, 현대인은 모두 자아가 단단한 존재들이다. 아무도 내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화되어 왔으며, 오늘날은 거의 요지부동이다. 그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매일 다툰다. 사회의 차원에서, 집단들은 똘똘 뭉쳐 저마다의 입장을 주장하며 매일 확성기를 틀어대고 있다. 결코 양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처벌하지 못해 으르렁댄다.
이런 완강한 고집 덩어리들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놓는다고? 정치에서도, 일상에서도 그런 소망이 말로 무성했었다. 하지만 성과 없음의 확률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작가는 그 원인을 생각한다. 모두가 자기의 주관에 집착하는 한, 결코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작가는 해법을 궁리한다. 그렇다면 다른 존재를 제 안에 심어서, 스스로 자기를 확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자기 증강의 과정을 보여주면 어떤가? 그래서 기억 자체를 상상으로 만들어, 과거가 미래가 된다. 북한 과학자 ‘옥미’와 남한 기자 ‘여름’은 만나서 ‘옥미의 여름’이 된다. 잠재 독자인 모든 한국인들도 미운 상대를 제 가슴 안의 심장 제세동기로 들여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이 소설은 한국 현대소설의 모형이 된 최인훈의 ‘광장’의 문제의식도 확장하고 있다. 밀실이 확장되어야 광장이 되고, 광장이 심화되어야 밀실이 된다.
◊조진주 ‘살아남은 아이’
조진주의 ‘살아남은 아이’(현대문학)에서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치밀하다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에서, 헐거운 데가 없도록 사건들의 “관절”(이건 김태용의 소설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들에 이음부를 단단히 죄어, 그 흐름을 빈틈없이 맞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장편소설이 종종 노출해 온 플롯의 부실함을 멋지게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잘 짜여진 소설은 아주 반가운 현상이다.
기본적인 주제는 타자를 향한 무관심과 이용 욕망으로 미만한 ‘어른들의 사회’를 고발하는 아이들의 탈출 혹은 해결의 모험이다. 이 무관심과 착취의 전반적인 상황이 가족적 규모로 압축되어 사건들의 성격을 도드라지게 하고 인물들의 반응을 체험적으로 만들면서 박진감을 주고 있다.
이 사회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책임을 통한 보호’와 ‘잘 키우고 싶다’는 ‘자양(滋養)’의 외관 아래, 훈육을 위한 폭력에 시달리고 어른들의 물질적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당한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직접적인 폭로는 불가능하며, 매번 우연이 끼어들어 사건들을 꼬이게 한다. 그런데 이 우연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경고했던 것처럼 플롯을 망치는, 뜬금없이 나타나는 우연들이 아니라, 우연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서 심리적 필연성을 띠고 사건들에 적절하게 개입하여, 사건들의 주름을 썩 찰지게 만들고 있다.
그리하여 어른들의 일상적 폭력은 우선 하나의 거대한 재앙으로 닥치고 아이들은 이 재앙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를 쓰게 되며,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어, 동굴 바깥으로 나가는 데 성공하게 된다.
한데, 방금 사건에 개입하는 우연들이 ‘우연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어 심리적 필연성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 욕망 자체가 우연인 경우들이 꽤 산재한다. 우선 약간의 돈을 챙기기 위해 딸을 유괴한다는 설정 자체가, 동기와 행위 사이에 큰 간격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사건의 전개는 이런 설정에 의해서 설치된 미궁 탈출의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 가정된 악마적 상황(혹은 나쁜 마법의 세계)에서 세 주인공만이 어린이 프로의 착한 어린이들처럼 서로를 신뢰하는 선한 존재로 ‘권화’되어서, 주변의 현실적 권능들(가령 경찰)은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하고,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을 ‘게임’으로 받아들여 문제를 해결하는 양태로 나타나니, 이는 애초에 이 소설이 게임의 형식으로 고안되었음을 가리킨다.
때문에 결말에서 주인물이 제기하는 질문, ‘계속 아이로 남을 것인가?’,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할 것인가’,는 여전히 이 소설이 현실 세계의 초입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거꾸로 증명한다. 그 고생 끝에 어른보다 더한 기지를 발휘해서 탈출해 성공했는데, 여전히 아이일 수 있다니?
그렇다면 이 소설은 정말 현실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독자는 작품 속의 미로 만큼이나 복잡한 단계의 생각의 층위를 이동시켜 가면서, 이에 대한 대답을 얻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가 그래도 유효하다는 것을 뜻한다.
◇구효서·소설가
◊김태용 ‘확장소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분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한마디로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기분의 출몰은 순전히 기분 스스로의 동기에 따르기도 하니까.
그런데 충동만 일었을 뿐 좀처럼 그 ‘한마디’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오래 궁리한 끝에 뜻도 소리도 낯선 쇄락이라는 말을 생각해냈으나 쇠락이라는 말과 소리가 같고 뜻은 아주 달라서 또다시 간신히 떠올린다는 말이 소쇄였다. 역시 낯설고 어렵다. ‘한마디’로 딱 떨어지는 말 찾기를 마침내 포기했다.
말 혹은 글자라는 건 그런 것이기도 했다. 애당초 말이나 글자는 그것이 지시하는 뜻과 대상과는 멀 뿐만 아니라 끝내는 만날 수 없는 것.
소쇄는 우리말로 대신하자면 시원하다, 후련하다, 맑다, 깨끗하다 등의 의미 계열에 속할 느낌일 것이다. 그 중 굳이 하나를 꼽자면 ‘시원하다.’
어째서 시원했을까. 어째서 한마디로 말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듯이 시원했던 까닭 또한 알 수 없어서 쇄락이나 소쇄를 떠올리는 데 든 만큼의 품을 들였고, 역시나 딱 떨어지는 이유 찾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태용도 그런 걸까. 그래서 말을 하면서도 자꾸 그 말을 곱씹는 걸까. 김태용은 한 발짝도 그냥 내딛는 법이 없다. 망설이다 한 발 내딛고, 내딛은 발로 땅바닥을 두드리다 다시 거둬들이고, 다른 지점을 골라 애써 딛고 고민하고 마침내 두 발짝 내딛었다가 세 발짝 훌쩍 뒤로 물러선다. 이처럼 그가 문장으로 그려내는 발자국의 연쇄는 그래서 직선의 모양새가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원이라고 하는 동그라미거나 또는 여타한 곡선이 아니다. 아니어서 흥미롭고 따라가 보고 싶다.
그의 족적은 무정형일 뿐 아니라 때로는 족적 스스로 족적을 지워버리기 일쑤여서 따라가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인데, 그럴 때 망연해지기보다는 시원해지는 것이다. 이 시원함의 정체를 무어라 하고 그 까닭을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김태용의 단편들을 읽을 때마다 공기 중에 터지는 작은 비누방울들을 연상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하늘빛을 반사해 반짝이면서도 그것은 곧 터져버릴 것들처럼 위태로웠으며 어디로 날아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길을 뗄 수 없었는데 그럼에도 비누방울들은 어느샌가 사라지곤 했다.
이번 소설집 후반부에 해당하는 단편들도 비누방울이긴 했는데 전반부에 실린 소설들은 그에 비하면 풍선이라고 할 만하다. 문장이 늘어나고 이야기가 자꾸 근육을 키우며 커지는데도 터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온전한 크기의 풍선으로 부푼 순간 마침내 큰 숨을 내 쉬듯 꺼지며 김태용 소설의 본령을 드러냈다.
큰 숨을 내쉬듯……. 그래서 시원했던 걸까. 평양에서 만난 리현심 박사가 화자인 여름에게 “상상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소. ……나 역시 누군가가 보고 있는 이마주(image) 속의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 깨닫고 있소. ……이제 눈에 보이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고 믿고 있소.”(’옥미의 여름’)라고 할 때거나, 여배우 문예봉이 이상의 아내 연심을 경성역에서 만나 김우진과 윤심덕 얘기를 꺼내면서 “그날 이후 몇 쌍의 커플이 에이더블 쑤싸이드를 했는지 모른다우. 남과 여는 물론 남남과 여여도 있지요. 우리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연심과 나도 함께 기차에서 몸을 던질 수 있다우.”(’우리들은 마음대로’)라고 말할 때의 왠지 모를 후련함.
누군가가 보고 있는 이마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며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함께 기차에서 몸을 던져 동반자살을 한다는데 어째서 그걸 듣는 내 귀가 시원해지는 걸까. 우리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말 때문일까.
롤랑 바르트는 언어 시스템에 통합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작가와 작가의 말에 대해 쓴다. 말과 세계의 불일치, 그로인한 치유될 수 없는 불안의 와중에다 자신을 위치시키는 작가의 환멸적 사명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우울이며 자아의 몰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하는 언어 질서로부터의 탈주며 해방이다. 시원함의 기원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것이 시원하지 않다면 고의로 말과 세계의 불일치를 조장하는 수고를 자청하지 않을뿐더러 즐길 수는 더욱 없을 테니까.
망설이고 곱씹으며, 부정형의 족적을 남기거나 지우거나 물러서며 도달하는 김태용 소설의 목적지는 어쩌면 유치환이 말한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생명의 서’)일지도 모른다. 사물도, 그 사물의 이름도 뜻도 사멸한 곳. 그런 곳이라야 충족되는 충동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므로. 그런 곳이라야 설명되는 이유라는 것도 있을 것이므로. 무엇보다 그런 곳이라야 말에 지배당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므로. 시원할 것이므로.
◊조진주 ‘살아남은 아이’
두 아이가 함께 유괴당하여 한 아이는 죽고 한 아이만 살아남는다. 돌아온 아이는 목격자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 아이의 기억과 진술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파헤쳐질 것이고 수사당국은 범인을 색출해 응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쫓고 쫓기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으레 엇갈린 오해와 빗나간 추리를 흘린다. 범행과 범인에 대한 독자의 접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며 사건 해결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작가가 마련한 숱한 장애물의 미궁에 빠져 독자들 스스로 프로파일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흥미를 맛보게 되므로 추리 과정의 순탄치 않음은 문제 될 게 없다. 다만, 작가의 기획에 따라 마침내는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는 구조이다 보니 자신의 짐작이 맞든 안 맞든 추리 자체를 즐기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일부러 숨겨 놓았다가 보여주는 식의 ‘그러한 이야기’ 구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가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이야기라면 독자의 반응은 전자 혹은 후자로 나뉠 텐데 ‘살아남은 아이’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제3의 반응이랄까 독법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그런 줄 모르다가 소설이 석연찮게 진행되고 얼마간의 당혹감과 마주친 다음에야 자세를 고치고 행간을 다시 주시하게 하는데, 어째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전혀 다른 반응을 유발하는 것일까에 대한 답은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있다.
소설의 시작부터가 명백한 유괴살인 사건이고 범인이거나 범인으로 추정되는 장호성과 이도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미성과 함께 유괴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지희가 있는가 하면, 그들이 유괴되는 장면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친구 규연이 있다. 이쯤 되면 이 소설을 어떻게 즐길지에 대한 판단이 서는데 소설의 진행은 자꾸만 그 판단을 벗어난다.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말했듯이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며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 하는 대신 그것을 마주하는 길을 택한 사람들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인용해 놓고 보면 작가가 말한 ‘폭력’이라는 것의 주체가 유괴와 살인을 저지른 범인처럼 보인다. 물론 그 폭력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폭력’은 다음 인용문의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하는’ 주체(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억지로 상처를 지우려하는 주체란 다름 아닌 우리다. 우리 중에는 심지어 피해자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런 우리의 폭력과 마주하는 일을 작가는 ‘용기’라고 적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작품 속에는 시현의 부모라든가 규연의 아버지, 죽은 미성의 부모인 도형과 은정 말고도 경찰과 이웃과 기자라는 이름의 ‘우리’가 등장한다. 한때 ‘우리’에 얼마간 속했었고 계속 속할 뻔했던 지희와 규연과 시현만이 이제는 ‘용기’있게 우리와 마주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강력범과 평범한 우리를 ‘폭력’이라는 말을 사용해 하나의 끈으로 묶는 작가의 과감하고도 기습적인 의도가 남다른 매력으로 읽히는 작품이다. 폭력 주체를 범죄인 쪽에게만 두고 그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그러한 이야기’로 읽다가, 어느 순간 우리가 역설적 차원에서 폭력에 연루되도록 짠 얼개와 맞닥뜨리게 되고, 그래서 읽는 나는 장호성 이도형과 공범이 된 듯한 당혹감에 빠지게 하는 작품이라니. 누가 범인인지 알게 되지만 끝내 미제사건으로 남기는 것만 봐도 작가가 이 소설을 ‘그러한 이야기’로 쓰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승우·소설가
◊조진주 ‘살아남은 아이’
기억 속의 유괴범을 추적하는 스토리를 가진 이 소설은 굳이 분류하자면 범죄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고 할 것이다. 추리소설에 걸맞는 긴장감과 속도감이 압권이지만, 그러나 추리소설의 외피는 간단치 않은 주제를 담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여러 가지 사유의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어 크고 촘촘한 그물을 만들었다. 이 그물의 이름을 ‘생존’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존은 삶의 벌거벗은 이름이며, 실존 이전의 삶이다.
소설에 나오는 유소년기의 인물들 가운데 폭력과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이는 한 명도 없다. 보호자인 부모는 보호하지 않는다. 폭력과 감금과 협박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 집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길거리를 떠돌고,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운이 좋다면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특히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그렇다. 이 소설은 무사히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사회의 비정함과 불안전함을 고발하는 데 신랄하다.
그리고 극복되지 않는 과거라는 괴물이 있다. 끔찍한 과거의 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한 사람의 인생을 지배한다. 우리는 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고 묻는 ‘지희’에게 ‘규연’이 하는 대답. “과거가 아니라서 그래. 계속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데 그게 어떻게 과거야?” 현재는 과거의 인질이다. 과거가 현재를 볼모로 잡고 있다. 규연과 지희는 과거의 ‘검은 방’과 ‘미로’에 갇혀서 바둥거린다.
이 괴물은 진실을 찾는 일을 두렵게 만든다. ‘지희’는 끊임없이 납치범으로 생각되는 사람의 몽타주를 그린다. 생존을 위해 그는 진실을 찾아야 하고, 얼굴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얼굴은 그가 생존을 위해 기억하지 않으려고 지워 버린 것이다. “다른 건 다 기억나요. 범인 얼굴만 빼고요.” 몽타주를 그리는 일은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고, 동시에 진실을 찾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지워야 한다. 생존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각자의 (과거의) ‘검은 방’에서 나오고 (현재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 생존을 삶으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작가는 존재하려는 용기와 호의를 가진 사람들의 연대를 제시한다. 어쩌면 뻔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어도 사람은 “매일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소설 말미의 문장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말로 바뀌어 들리는 신비를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나는 그것이 작가의 진심이 독자를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김인숙·소설가
◊김태용 ‘확장소설’
“‘확장소설’이라는 제목은 ‘확장영화’에서 빌려왔다. 영화라는 매체를 실험한 확장 영화의 개념과 방법론을 소설로 시도한 것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영화는 영화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만 소설은 소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언어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태용이 한 말을 길게 인용했다. 소설은 소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이 특히 흥미롭다. 김태용이 소설 안에서,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가지고 얼마나 잘 노는지 알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독자라면 그가 언어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알 것이다. 소리, 노이즈, 리듬, 언어가 가진 속성을 극대화시켜 실험한 전작들이 많다.
이번 소설집 ‘확장소설’에서는 독특한 서사들이 보이기도 한다. 예컨데 ‘방역왕 혹은 사랑 영역의 확장’은 1960년대 국립 방역연구소에서 일을 하던 조부의 스토리로부터 시작하여 흥미진진한 서사가 펼쳐지는데, 김태용이 그 서사를 위해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금방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럼에도 빨려드는 서사다. ‘옥미의 여름’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근미래의 평양이 무대다. 역시 흥미롭다.
아홉편의 단편소설들은 각기 고유하다. 무슨 말을 더 덧붙일 것인가. 그냥 김태용의 소설 몇 부분을 소개하기로 하자. ‘낮을 위한 착각’, 그리고 ‘삐에르 밤바다’에서 인용한다.
“말과 글은 함부로 하거나 써서도 안된다. 소설가가 되고나서 알게 된 것은 그것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찻잔에 고인 맑고 노란 물을 내려다보았다.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찻잔에 비친 얼굴을 보며 다시 살아볼까, 라고 썼던 시인의 말은 거짓말이다. 그는 분명 다시 살아볼까, 라는 문장을 미리 쓰고 찻잔에 비친 얼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모든 노래는 흘러가야 한다. 노래야 만들 수 있지 않은가. 부르면 노래가 되지 않는가. 부르는 노래가 있고 부르지 않는 노래가 있다. 나는 누구도 부르지 않는 노래를 불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책의 목차를 이어 만든 노래가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댄스 없는 댄스 필름을 만들던, 삐, 잠시, 아니 계속해서, 이제 막 시작했지만, 시작 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지, 우리의 친구, 이름을 부를 순간이 오면, 그보다 먼저, 이제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대답 없는 부름이 가능할까, 우리가 들었던 대답들은 모두 부름에 대한 대답이 맞을 까, 대답이 없다는 걸 알고도 부를 수 없을까 불러야하지 않을까 어떻게 부를까, 어떻게 대답을 듣지 않고 부를까, 이런 물음을 지속하다 보면, 최초의 물듬은 역방향으로 달려가기 마련이어서…”
◊조진주 ‘살아남은 아이’
어느날 한 아이가 유괴되어 목숨을 잃는다. 얼떨결에 함께 납치가 되었던 화자는 도중에 풀려나 살아남지만, 유일한 목격자로서 범인의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죄의식과 함께 살아간다. 살아남았으나 완전히 살아남지는 못한 삶이다. 화자인 내가 범인을 추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흡입력있게 읽힌다. 그러나 그 이유가 ‘죽음- 범인- 반전’ 과 같은 추리소설적 요소 때문은 아닌 듯하다. 조진주가 소설 내내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질문은 범인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죄의식에 관한 것이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남은 죄의식. 그것의 온당함과 부당함에 대해. 무엇이 온당한지 알고 무엇이 부당한지 아는데, 안다고 해결되지 않는 그것에 대해. 그것은 아마도 폭력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성질일 터. 폭력은 물리적이고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이름,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를 온전히 피해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게 하는, 소위 ‘무구한’ 질문들. 그 질문들이 겹겹이 쌓이며 사회적 그물망을 조성한다. 그속에서 피해자는 철저히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어쩌면 폭력이 남기는 최종적인 상흔일지도 모른다.
화자가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기억해내야하는 것일까. 무엇을 기억해낸다고 한들, 과연, 온전한 회복은 가능한 것일까. 소설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이 이야기를 조진주는 흥분하지 않고, 과장하지 않으며 담담히 서술한다. 사건이 일어난 후 거의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인 만큼 문장은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담는다.
폭력의 피해자들이 우연한 기회에 한집에서 동거하게 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가족으로부터 떨어져나온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은 애쓰지 않아도 서로를 위로한다. 장편소설로서의 깔끔한 플롯,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질문, 그리고 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태용 ‘확장소설’
김태용의 소설집 ‘확장 소설’에는 9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소설집의 표제와 동일한 제목의 소설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관류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용어가 확장 소설인 셈이다. 작가는 확장 영화(expanded cinema)에서 가져온 용어라고 밝히고 있는데, 소설과 관련된 내외부의 경계를 넘어서 소설이 기술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소설으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단편 ‘방역왕 혹은 사랑 영역의 확장’이 확장 소설이라는 주제의식과 닿아있다고 생각되었다.
2020년 코로나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서 투석을 받고 있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할아버지는 1964년에 급작스럽게 사망했고,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아버지는 조기 제대를 했고, 아버지는 그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소속 부대는 다음 해에 월남전에 파병되어 모두 전사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아버지를 모르고서는 제대로 씌어질 수 없다. 아버지 서사는 할아버지를 향해서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며 확장된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세균학을 공부했고 평생을 공중방역에 종사한 ‘방역왕’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남긴 책, 사진, 주변인의 증언들, 관련 연표, 신문기사와 기록영상 등을 수집한다. 그리고 1917년에 태어난 할아버지가, 1918년부터 유행한 스페인 독감에 감염된 유모의 젖을 먹고 자라났음을 알게 된다. 조선의 방역왕에게 스페인 독감이 운명처럼 다가왔다면, 21세기의 소설가인 손자(나)에게 코로나는 허구적인 현실이었다. 줌으로 수업을 마친 어느 날 컴퓨터가 작동 오류를 일으키면서, 내가 있는 태양계(R-19)와 할아버지가 있는 태양계(R-11) 사이에서 문자 소통이 가능해지는 마술적인 일이 벌어진다. SF소설에서 많이 논의되는 다중우주론으로의 확장.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의 죽음이 바이러스와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몸에 생겨나는 녹색 반점을 바이러스가 보내는 시그널로 여기고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내버려 두다가 생긴 일이라는 것. 이를 두고 바이러스를 향한 사랑의 확장, 아니면 운명애(amor fati)의 확장이라도 불러도 좋지 않을까.
김태용의 소설들은 이제껏 씌어진 적도 없고 읽혀진 적도 없는 글쓰기를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의 소설에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라고 느껴지는 대목들은, 새로운 글에 대한 욕망이 소설의 육체성과 뒤엉켜 있을 때이다. ‘방역왕 혹은 사랑 영역의 확장’의 경우, 할아버지는 책, 사진, 목소리, 연표, 기사, 영상, 다중우주 등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생성되는 작은 이야기이자 시뮬라크르이다. 글쓰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적 상상력(아즈마 히로키)을 소설의 방법론으로 적용해 본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해 볼 따름이다. 소설 속에서 데이터베이스의 흔적을 찾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동안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조진주 ‘살아남은 아이’
폭력이나 범죄와 같은 외상적 사건은 삶에 불가역적인 단절을 기입한다. 사건 이전과 이후의 삶은 연속성을 갖지 않으며, 사건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피해자는 트라우마를 지닌 채로 사건 이후의 일상을 살아간다. 조진주의 장편소설 ‘살아남은 아이’는 11살 때 지희는 동네의 친한 동생 미성과 함께 유괴를 당했다. 지희는 풀려났지만 미성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지희는 범인 몽타주를 완성하지 못하거나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등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수사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유괴 사건은 미제 사건이 되고, 지희는 죄의식과 자기불신에 짓눌려서 사건을 외면하고 침묵한다. 17년 만에 사건에 다시 소환된 지희는 규연·시현 등과 연대하며 사건의 진실과 마주하고 스스로를 치유해 간다.
폭력은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며, 대상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폭력이 동반되는 외상적 사건에 휘말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외상적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붙들고 정면대결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상적 사건 이후 피해자에게 덧씌워지는 다양한 억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
물론 피해자가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을 수도 있고, 피해자다움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억압과 자기혼란에 시달릴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작품을 쓴 작가나 독자인 우리들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알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폭력과 맞선 사람들의 승리가 반드시 보장되지는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러니 마침내 최선의 해결책을 찾아내고 스스로 살 힘을 얻게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판타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감동적이었던 것은, 글의 맥락 속에 숨어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폭력에 맞선다고 해서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을 구제한다는 설정이 판타지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 외상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피해자를 둘러싼 2차 가해에 관한 뉴스를 지겨울 정도로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피해자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폭력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 이 작품에 오랜 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이유를, 아마도 이 부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