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에스파’의 세계관 영상‘넥스트 레벨’홍보 포스터. 해당 영상에선 멤버 카리나, 윈터, 닝닝, 지젤(맨 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이 각자의 아바타(ae)와 함께 광야에서 블랙맘바에 대항한다는 에스파 발매곡들의 배경 줄거리를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SM

인간들이 남긴 온라인 데이터로 만들어진 아바타 ‘ae(아이)’. 인간과 교감(싱크)이 깊어진 ae들은 현실세계(리얼월드)에서도 실체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악당 ‘블랙맘바’의 방해로 싱크가 깨지고, ae들이 소멸돼 간다. 이를 막으러 ‘광야(무의식의 가상 세계)’로 향하는 걸그룹 ‘에스파’에게 조력자 ‘나이비스’가 당부한다. “광야의 것을 탐내지 말 것, 길을 돌아보지 말 것(에스파 노래 ‘넥스트 레벨’ 가사)”.

영화나 드라마 줄거리가 아니다. 최근 4인조 걸그룹 ‘에스파(소속사 SM)’가 유튜브에 공개한 17분짜리 영상 ‘넥스트 레벨′의 내용. 자신들의 음악에 연속적으로 담아온 스토리와 설정을 만화,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웹드라마 형식에 담은 것이다. 영화제작사 ‘써티세븐스디그리’의 손태흥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에스파와 같은 요즘 아이돌과 팬덤은 이런 설정과 스토리를 ‘세계관’이라 통칭한다. 세계관은 최근 K팝 그룹의 ‘성공 요인’으로도 꼽힌다. 세계적 보이그룹 방탄소년단(BTS)도 ‘학교 3부작’ ‘청춘 3부작(화양연화)’ ‘러브유어셀프 기승전결’ 등 연작 앨범으로 뚜렷한 세계관을 선보여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는 특히 영화, 웹툰, 웹소설로까지 표현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음반기획사들 간 ‘세계관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영화감독·시인·소설가까지 뛰어들어 ‘세계관’ 만들기

2020년 10월 데뷔 앨범보다 세계관을 담은 영화 ‘피원에이치’를 먼저 선보이며 데뷔한 보이그룹 피원하모니(소속사 FNC)가 대표적 예. ‘계춘할망’을 연출했던 ‘창감독(윤홍승)’이 맡고, 배우 정진영, 정해인, 개그맨 유재석 등이 출연해 화제가 됐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 전산망에 따르면 극장 정식 개봉 후 누적 관객 2284명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가 절정을 이뤘을 때도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이다.

대형 음반기획사들은 앞다퉈 자신들이 배출한 다양한 아이돌을 중심에 둔 세계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SM은 2020년 소속 가수들의 세계관을 ‘SMCU(SM Cultural Universe)’라 통칭하고,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 기존 가수들에게 새 세계관도 부여 중이다. 소녀시대는 이달 초 데뷔 15주년으로 낸 7집 수록곡에서 에스파 세계관에 쓰였던 ‘광야’ 개념을 가사로 쓰고, “우리도 ‘소리의 여신’이란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SMCU 제작을 총괄 중인 모나리 SM 책임은 “웹툰·웹소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전문가, 특히 함축적인 표현을 쓰는 시인과의 세계관 협업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2020년 극장 개봉한 보이그룹 피원하모니의 세계관 영화 포스터. /FNC

BTS 소속사 하이브는 장편 ‘지구 끝의 온실’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 김초엽과 올 초부터 “‘하이브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협업 중”이라고 했다. 하이브는 ‘착호갑사(BTS)’ ‘별을 쫓는 소년들(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 자사 가수들의 세계관을 토대로 선보인 웹툰·웹소설의 뼈대 설정을 ‘오리지널 스토리’라 말해왔다. 하이브는 이 밖에도 기존 BTS 세계관들에 ‘BU(BTS Universe)’라 이름 붙이고, 이를 토대로 제작한 드라마 ‘유스(Youth)’의 공개 시점을 조율 중이다.

JYP는 올해 2월 자사 최초의 세계관 걸그룹 ‘엔믹스’를 데뷔시켰다. 멤버들만의 유토피아인 ‘믹스토피아’와 ‘현실세계’가 분리된 세계관을 데뷔곡 ‘O.O’(오오)에서 서로 다른 박자(133·100bpm)의 멜로디를 이어붙인 작곡으로 표현했다.

◇핵심은 ‘유대감 형성’

최근 아이돌들은 특히 하트, 달, 별, 나비 등 멤버마다 상징물을 부여받고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해당 상징물이 쓰인 특정 장면을 노출시키면 팬들이 이를 두고 그 속 뜻을 유추하는 놀이가 소셜미디어에서 인기이기 때문이다. ‘제1회 영국 BTS 학술대회’를 주최했던 콜레트 발메인 킹스턴대 교수는 “K팝 팬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세계관 속 상징을 직접 해석하면서 몰입감, 특히 ‘연결됐다’는 유대감을 강하게 갖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