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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짐승들에게 ‘맘에 맞는 이성과의 영원한 삶’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멸종위기종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열심히 흘레붙어 새끼를 가능한한 많이 생산해 째깍 째깍 다가오는 절멸 시한을 조금이라도 늦춰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눈에 뵈는 암수를 콕 찝어서 ‘무드’를 조성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윤리개념이 없는 짐승들이 이짝 저짝 뵈는대로 근친으로 붙을 경우, 순식간에 짐승판 합스부르크 왕가가 펼쳐지고, 종 자체의 멸절 시기는 더 앞당겨질지 몰라요. 동물원들끼리 네트워킹을 구축하고, 유전정보를 공유해 근친 가능성이 없는 생판 모르는 녀석들끼리 짝을 지우려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러다보니 영문도 모른채 이 동물원 저 동물원을 전전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짐승들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수컷 북극곰이 바로 그런 경우죠. 새 짝을 맞아 신방을 차리러 가다가 별안간 혼이 빠져나가 총각귀신이 되어버린 비련의 북극곰 얘기입니다.
사건은 10월 25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동물원에서 발생했어요. 스무살 수컷 북극곰 페이튼이 보금자리가 있던 노스캐롤라이나를 떠나서 켄터키주 루이빌 동물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몸무게 450㎏이 넘는 거대 북극곰이 800㎞를 가야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죠. 전담 돌봄팀이 따라붙어 혹여나 스트레스를 받는건 아닌지 세심하게 돌봤어요. 문제는 길을 떠난지 2시간이 지났을 때 발생했어요. 그 산만한 덩치의 곰이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일행을 엄습했습니다. 긴급 출동 수의사는 최종 사망 선고를 내렸어요.
부검 결과 심장질환이 있었고, 부신에선 종양이 발견됐어요. 노쇠해지면서 골관점열도 앓고 있었고요. 사람이 동물의 속깊은 몸과 마음까지 아는 데는 한계가 있는 노릇이기에 동물원에서 예고없이 벌어지는 돌연사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닙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이번 사례는 좀 짠합니다. 종족 번식의 의무를 부여받고 떠난 장도가 허무하게 마무리됐으니까요.페이튼은 스무살이었습니다. 북극곰의 최장 수명이 서른 살 정도인 걸 감안하면, 백발의 중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수컷으로서의 스태미너와 테크닉은 타고났던 모양입니다. 미국 동물원 수족관 협회(AZA)에서 녀석과 루이빌 동물원의 암컷을 짝지웠거든요.
예정대로라면 새로운 동물원에 둥지를 틀고, 조심스러운 적응기간을 거쳐서(연예계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고들 하죠) 합사가 이뤄졌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바람대로라면 수태 뒤 8개월이 지나면, 암컷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새빨간 새끼가 태어났을 겁니다. 이 새끼 북극곰의 인기는 판다가 부럽지 않았을 거예요. 눈처럼 흰 털을 가진 선한 인상의 짐승이 보여주는 과격한 야성미에 인간은 진작에 매혹돼왔거든요. 게다가 기후온난화로 북극의 동토가 빠르게 녹아들면서 ‘사람 때문에 멸종위기에 내몰린 가련한 동물’의 대명사가 됐잖아요.
2003년 11월 시카고 브룩필드 동물원에서 태어난 페이튼은 멤피스 동물원을 거쳐 2년전에 노스캐롤라이나로 왔습니다. 이 동물원 저 동물원을 옮겨다닌 것을 보면, 대를 잇는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진득하게 한곳에 정착해 살아가기 어려운 운명이었고요. 이 돌연사가 종의 명맥을 잇는데 심대한 타격이 되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북극곰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졌습니다. 전세계 여덟종류의 곰 중에 가장 덩치가 큽니다. 소형곰들인 태양곰(말레이곰)·안경곰·판다와 비교하면 갑절 이상 큽니다. 덩치만 큰게 아녜요. 대부분의 곰들은 육식과 채식을 병행하는 잡식이거나, 채식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육식을 하더라도 썩어가는 사체를 파먹거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설치류나 물고기를 사냥하는 정도죠. 하지만, 북극곰은 이들과 다르게 큼지막한 먹잇감을 직접 사냥하는 살육의 명수입니다.
푸성귀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이들의 주된 먹잇감은 같은 식육류인 기각류(물범·바다코끼리 등)였습니다. 맹수가 맹수를 잡아먹는 거예요. 추위를 버텨내기 위해 온몸이 지방질로 가득한 이들만큼 요긴한 식사거리는 없거든요. 강추위를 버텨내는데 살코기보다는 비계가 더 제격일 수 있습니다. 수백·수천마리씩 무리생활을 하는 바다코끼리들을 파고든 뒤 공포심을 조장하고 교란시켜 집단 멘붕 상태로 몰고 간 뒤 기어이 한마리를 끌어냅니다. 물범 사냥은 더 극적입니다. 얼음 틈바구니로 물범이 잠시 머리를 내밀고 숨을 쉰다는 점을 간파해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강력한 앞발로 후려쳐 그 자리에서 두개골을 박살내버립니다. 눈처럼 새하얀 얼음조각이 금세 새빨간 피로 물듭니다. 희거나 검거나 잿빛인 북극의 풍경이 컬러플해지는 아주 드문 순간이죠. 북극곰의 일격에 생을 마감한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그 피는 포식자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사냥한 물범의 숨통을 끊는 최소한의 자비조차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우려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입니다. 적나라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비위가 약하신 분은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섬뜩함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내는 북극곰 특유의 사냥법은 최근 보기가 몹시 힘들어졌습니다. 기후 온난화로 북극의 동토가 녹아들고, 유빙이 사라지면서 동토·얼음을 플랫폼으로 삼는 특유의 사냥법을 발휘하기 어렵게 됐거든요.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로 식성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식습관을 변모시켰습니다. 피와 살을 탐닉하는 육식은 유지하되, 바뀐 환경에 맞는 새로운 사냥감을 개척한 것이죠. 바로 순록입니다. 네, 루돌프 사슴코로 유명한 그 사슴 족속말입니다. 지난해 북극곰이 순록을 사냥하는 장면이 처음으로 포착됐습니다. 순록이 지쳐나가떨어질때까지 물속에서 공세를 퍼붓는 수중전이었죠. 또 다시 강력한 기후 변화로 인해서 순록마저 사냥이 어려워질 경우, 북극곰은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사냥감을 개척할 것으로 보입니다. 곰의 최강자답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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