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가 어린 쿠두의 사체를 물고 있다. 정황상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쿠두를 물어죽인 것으로 보인다. /Roaring Earth. Latest Sigh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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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생태를 인간의 기준으로 해독하고 예측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소의 무리에 속하는 초식동물이니까 알아서 잘 지내고 서로를 배려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한 우리에 합사했다가는 대재앙이 일어날 수 있어요. 올 봄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존 볼 동물원에서 일어났던 참사 같은 상황 말이죠. 하마는 풀 뜯는 괴수라는 악명이 다시금 확인된 사건이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지난 5월 동물원으로 가보겠습니다. 단조로운 전시 체계를 개편해서 더 많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심산이었을까요? 동물원은 일부 초식동물의 합사를 결정합니다. 중·서 아프리카에 사는 두 초식동물이 입주민으로 결정됐어요. 영양인 시타퉁가와 피그미하마였습니다. 둘다 충분히 매력적이고 이색적인 놈들입니다.

최근 동물원에서 영양을 물어죽인 피그미하마와 같은 종. 덩치는 훨씬 작지만 날카롭고 기다란 송곳니는 전형적인 하마의 모습이다. /Mlive.com

시타퉁가는 아프리카 영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늬를 갖고 있는 종류로 꼽힙니다. 몸 전체를 갈색 털로 덮여있는데 등쪽에는 규칙적으로 선형의 무늬가, 배 부분에는 눈처럼 흰 점무늬가 찍혀있죠. 영양 중에서도 수중 생활에 아주 훌륭하게 적응해 평소에도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저물녘에야 뭍으로 올라와서 풀을 뜯어요. 피그미하마는 ‘하마의 귀염둥이 미니어처 버전’으로 알려져있죠. 보통하마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아담한 몸집에 하마 특유의 포악하고 거친 성미도 덜하거든요. 동물원에서는 서식지도 겹치고, 수중생활도 즐기며, 무엇보다도 발굽이 짝수인 소의 무리(우제류)에 속하는 ‘패밀리’라는 점도 고려했던 것 같아요. 준비기간을 거쳐서 마침내 아프리카 습지 기후에 비슷하게 꾸민 큰 합동우리에 녀석들을 풀었습니다. 합사 첫날이었죠. 비극은 그 때 발생했습니다. 순하디 순한 짐승으로 알려져있던 피그미하마가 별안간 시타퉁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합사 첫날 피그미하마에게 물려죽은 수컷 시타퉁가 '초퍼'의 생전 모습. /JBZoo/WWMT. News Channel 3

아무리 ‘미니어처’라지만, 이놈 역시 하마입니다. 강력한 이빨에 치명상을 입은 시타퉁가가 쓰러집니다. 동물원 스태프들이 황급하게 놈들을 분리시키고, 시타퉁가를 응급치료했지만, 피그미하마의 일격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초프’라는 이름이 붙었던 여섯살짜리 시타퉁가는 숨이 끊어졌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 연방 농무부까지 조사에 나섰고, 얼마 전 심층조사 결과가 발표됐어요. 동물원의 합사 시도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이뤄졌다는 취지의 내용입니다. 합사 추진 과정에서 피그미하마가 최소 여덟번이나 공격성을 드러냈다는 거예요. 하마는 기본적으로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성질이 강렬한데다, 다른 종의 동물과 합사된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련된 합사 준비 과정이 결여됐다는 점도 지적됐습니다. 충분히 준비했다는 동물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좀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이뤄져야 했다는 지적입니다. 조금이라도 다채롭고 입체적인 관람환경을 만들려는 동물원의 노력은 물론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중요한 건 앞으로 비슷한 참사가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 테지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새삼 확인된 것은 피그미 하마도 결국은 하마라는 겁니다. 풀을 뜯는다는 사실만 빼고는, 사자·표범·하이에나 등의 사바나 맹수와 다를바 없는, 아니 그보다 더 무섭고 치명적인 맹수 말입니다.

하마가 리카온을 피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온 부시벅을 겨냥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Latest Sightings

‘미니어처’라고는 해도 피그미하마 역시 하마족 특유의 역대급 송곳니를 갖고 있었을 거예요. 그 송곳니의 일격에 우아한 털가죽과 그 아래 살갗, 그 속의 뼈와 내장이 우두두둑하고 일격에 부서졌을 것입니다. 이 습격이 끔찍한 것은, 여느 육식동물처럼 잡아먹지도 않을 목적으로, 단순히 영역에서 거치적 거린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피그미하마를 살생범으로 힐난할 일도 아닙니다. 야생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요.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마는 초식동물인데도 무시무시한 살육괴물로 군림합니다. 제 영역에서 거들먹거리면, 눈에 뵈는 것 없이 가차없이 처단합니다. 이런 장면이 사바나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우선 동영상(Beastly Youtube) 한 편 보실까요?

영양 부시벅이 끔찍한 순간을 맞았습니다. 사바나의 사냥꾼중에 가장 엽기적이고 잔혹한 방법으로 살육하는 리카온에게 쫓겨서 막다른 곳까지 몰린 거예요. 리카온은 다른 맹수들과 달리, 혼이 빠져나간 사체는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산채로 눈을 치켜뜨고 울부짖는 먹잇감의 배를 찢고 내장을 끄집어내 먹어치웁니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보니 먹잇감이 된 가련한 초식동물이 이미 몸의 대부분이 파헤쳐지고 포식자 뱃속으로 빠져들었는데도, 정신이 또렷해 머리만 온전한 상태에서 눈을 꿈벅꿈벅 뜨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먹잇감이 임신 중인 암컷이었으면 차마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치는 끔찍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부시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뻘속으로 들어갑니다. 얼마 간 잡힐 수 있는 시간을 늦출순 있지만, 근본적인 상황을 바꾸지는 못할 것처럼 보여요. 그 때 산더미만한 덩치의 하마가 여보란 듯 등장합니다. 뻘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부시벅 옆에 자리합니다.

부시벅이 자신을 쫓아온 리카온들과 늪지의 괴수 하마 사이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Latest Sightings

리카온도 자신들이 떼로 덤벼들어도 쓰러뜨릴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갑자기 나타난 훼방꾼에 씨근덕거리면서도 눈앞의 먹잇감을 노려보며 기회를 살핍니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 하마는 부시벅의 구원자가 될 것처럼 보였어요. 시간이 흐르고 지친 리카온들이 물러가면, 부시벅을 향해 ‘놈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어여 돌아가라’고 부시벅의 몸을 뭍으로 밀어올려줄 수도 있을 듯해요. 둥글둥글 착하게 생겼으니까요. 이런 결말을 예상하고 있을 때즈음, 하마는 돌연 입을 쩍 벌리더니 부시벅의 몸뚱아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와드드득...” 엑스칼리버 칼보다 날카롭고, 청룡언월도보다 강력한 하마의 송곳니가 부시벅의 몸통을 꿰뚫는 소리가 모니터 밖 까지 들리는 듯 합니다. 단 한번의 공격으로 부시벅은 저승길 고속도로를 탑니다. 살가죽 안의 뼈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 조각은 내장과 혈관을 파고들면서 곤죽이 됐을 거예요.

수컷하마들의 다툼은 초식동물계에서 가장 격렬하고 잔혹하게 펼쳐진다. /Phil Branham. Shenton Safaris

일격을 당한 부시벅은 최후의 힘을 짜내어 눈을 치켜뜰고 하마를 향해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럼 하마는 썩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죽어가는 주제에 끝까지 말이 많군. 어여 꺼져라.” 죽어가긴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버둥거리면서 희멀건 눈을 뜬 부시벅의 몸뚱아리가 처연하게 리카온들에 의해 뭍으로 끌려나갑니다. 본능에 따라 리카온들은 부시벅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바로 육고기 해체를 시작할 거예요. 그렇게 구원자가 될 줄 알았던 하마는 상황을 종결하는 살육자가 됐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담은 동영상(Latest Sightings Youtube) 한 편 더 보실까요?

상황은 유사합니다. 하마는 건 그대로인데, 리카온이 아닌 백수의 왕 사자가 등장했고, 부시벅이 아닌 임팔라가 비운의 주인공이예요. 녀석 역시 사자에게 쫓기다가 뻘속으로 대피했습니다. 리카온과 달리 사자는 고작 숫놈 한마리를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뻘속에 들어가서까지 먹이를 끌어낼만큼 먹잇감에 대한 집착이 커보이지도 않았어요. 잘만 버티면 살아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또 하마가 예고없이 나타났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습니다.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하마는 입을 쩍 벌리고, 임팔라의 몸뚱이를 물고 패대기칩니다. 마치 무시무시한 치악력과 원심력으로 먹이를 공중분해하는 악어의 ‘데스 롤(death roll)’이 떠올려질 정도예요. 하마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임팔라의 가엾은 몸뚱이가 뻘 속에 거꾸로 처박힙니다. 하늘을 향해 뻗은 가냘픈 발이 버둥거립니다. 싱크로즈나이즈드 스위밍의 연기를 연상시키는 이 버둥거림은 이 임팔라 생애의 최후의 몸짓이 될 운명입니다.

하마가 얼룩말 사체에 입을 갖다대고 마치 살점을 먹는 듯한 동작을 취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Wildest Kruger Sightings Facebook

하마는 왜 이렇게 흉포하고 잔인할까요?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이 족속을 힐난할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영역에 대한 집착이 그 어느짐승보다도 강한 하마입니다. 악어, 영양, 심지어 같은 종족까지도 자신의 영역을 침범는 것은 모두가 공격대상입니다. 같은 무리의 새끼라도 봐주지 않습니다. 새끼 하마의 가장 큰 무서운 적은 같은 무리의 수컷입니다. 이 극도의 폭력성이 하마를 번성시키는 동력이 됐어요. 철저하게 강한 놈만이 살아남는 투쟁이 본질적 속성인 무리입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이긴놈이 모든 권리를 확보하는 최강자 경쟁 시스템은 족속의 투쟁력을 극도로 끌어올려줬습니다. 그 덕에 ‘풀뜯는 괴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강한 피지컬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성체 하마들이 달려들어 새끼 하마를 살육하는 장면. 하마는 초식동물 중 가장 흉포한 무리생활을 하는 것으로 악명높다. /Africa Geographic

한편으로는 하마의 식성이 지금처럼 풀을 뜯는게 국한된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어요. 모든 우제류가 풀을 뜯는 초식동물인 건 아닙니다. 하마·영양·기린과 육촌뻘인 멧돼지는 초식동물의 본성을 타고 났지만, 주위 환경에 걸맞게 뱀과 새알, 쥐까지 잡아먹는 잡식성으로 스스로를 변모시켰습니다. 이런 변모가 하마에게 일어난다면, 그래서 ‘육식하마’가 실제로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각에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마가 물에 둥둥 떠다니는 초식동물 사체에 입을 대고 마치 살점을 찢어먹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심심찮게 포착되고 있거든요. 실제로 썩은 고기에 맛을 들인것인지, 그냥 호기심에 파헤쳐보는 것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일 전자를 넘어 생고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 머리칼이 쭈삣 서고,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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