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 ‘라이온킹’이 개봉한지 30주년되는 해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이야기의 뼈대를 얻어 아프리카 사바나 짐승들을 의인화한 이 작품은 등장 짐승들의 생태와 습성이 사실과 전혀 다른 터무니없는 설정으로 오류와 억지가 넘쳐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원작 만화영화에 이어 뮤지컬, 실사영화, 관련 캐릭터 산업으로 무한 반복·확장하며 월트디즈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이 됐습니다. 라이온킹을 빛냈던 주·조연급 짐승 캐릭터들의 적나라한 속살을 연중 게재합니다. 하쿠나 마타타~
-수요동물원장-
어미 뱃속에서 수 개월을 무럭무럭 자란 새끼 톰슨가젤이 마침내 세상에 첫발을 뗐습니다. 본능에 따라 불과 몇분만에 두 발로 딛고 일어나 어미 젖을 빨며 사바나의 구성원으로 무럭무럭 자라나려던 참이었어요. 이 탄생의 현장에 짐승 한마리가 접근합니다. 성성한 갈기를 드러내며 달려오는 수사자일까요? 찰나를 노린 순식간의 습격으로 악명높은 표범일까요? 살기어린 기괴한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도달한 하이에나였을까요? 꼬리를 쳐들고 무서운 집단공격으로 살아있는 몸뚱아리를 펄떡거리는 내장을 끄집어내 으적으적 씹어먹는 ‘사바나의 피라냐’ 리카온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들 포식자가 모두 즐겨먹는 대표적인 먹잇감 혹멧돼지였습니다. 라이온킹의 주책맞지만 사려깊고 우애와 자비가 넘치던 바로 그 놈 품바 말입니다. 아, 별 일 없겠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반전의 충격 때문에 더 잔혹한 살육극이 시작합니다. 동영상(Natural Life Facebook)부터 보실까요?
불도저처럼 접근하는 멧돼지앞에서 이제 출산한 암컷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사람의 잣대로 판단하고 감정을 주입해서도 안됩니다. 냉정히 말해서 이 암컷이 품안의 새끼를 포기하고 다음 번식철까지 살아가는게 이 톰슨가젤족(族)이 번성하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여느 멧돼지와 포스부터 다릅니다. 등줄기에는 갈기가 성성하게 휘날리고, 네 족발에는 튼실한 근육이 붙어있어요. 출렁한 뱃살대신 새끈한 근육이 온몸을 덮었습니다. 사자와 표범·하이에나·리카온의 발톱과 이빨을 피해 이날 이때껏 살아난 놈의 모습에서 일본 만화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멧돼지 산신령 ‘옷토코누시’가 겹쳐보일 정도예요. 사바나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축적된 경험으로 배워 놈은 아직 어린 톰슨가젤의 냄새를 맡고 한달음에 달려왔을 겁니다. 이렇게 손쉽게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기회를 본능으로 포착한 겁니다.
놈의 모습은 품바가 아닙니다. 피와 살에 탐닉하는 사자 스카나 하이에나의 혼령이 순간 돼지 몸뚱이에게 들린 듯, 맹수의 모습으로 돌변합니다. 앞발로 새끼 영양의 몸뚱아리를 짓이기고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이빨을 깊숙히 파고 듭니다. 혹시나 하는 월트 디즈니식 반전은 없었어요. 영화로 알려진 쥬라기 공원의 원작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을 구절을 빌리자면 이렇게 끝납니다. “놈이 순간 고개를 홱 쳐들었을 때 입가에는 너덜너덜한 살점이 매달려있었다” 라이온킹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이자 화두는 ‘생명의 바퀴(Circle of Life)’입니다. 먹고 먹히는 악순환 같아도 큰틀에서는 대자연이 순환하는 동력이라는 것이죠. 이 잔혹한 장면도 그 중 하나입니다. 어미 뱃속에서 갓 나온 어린 톰슨가젤은 세상 구경을 채 하기도 전에 멧돼지에 이빨에서 갈갈이 해체돼 다시 멧돼지의 뱃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가녀린 몸뚱이는 멧돼지의 영양분이 흡수되고 그 종족의 번성을 위한 동력에 쓰이겠죠. 나머지는 후두둑 똥덩이로 배출돼 초원의 비료로 쓰일 터입니다. 아니, 오랜 기간 강자로 살아온 멧돼지는 어쩌면 이 날 한 무리의 리카온에게 붙잡혀 산채로 배를 찢고 내용물을 먹어치우는 특유의 포식법에 의해서 희생될수도 있어요. 결론은 어떤 살육이든 헛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자연이 냉엄하면서도 잔혹한 까닭입니다. 라이온킹에 영양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양을 언급하는 대사는 딱 한 차례 나와요. 사자왕 무파사가 왕세자 심바에게 대왕 수업을 하는 장면에서 이렇게 가르치죠.
심바:그런데 아빠, 우리는 영양을 잡아먹지 않나요?
무파사:맞다. 심바. 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흙이되면 거기서 풀이 자라고 다시 영양들은 그걸 먹지. 우리모두 위대한 생명의 바퀴의 한 부분이란다.
영양은 결국 사자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월트 디즈니조차도 윤색하기는 곤란했나봐요. 비록 말하는 캐릭터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양은 군데 군데 비중있는 도구로 쓰입니다. 서곡 ‘생명의 바퀴(Circle of Life)’가 웅장하게 흘러나올 때 우아한 자태의 임팔라와 당당한 뿔을 가진 쿠두, 기품이 한껏 넘쳐나는 오릭스, 통통튀는 점프력으로 이름난 스프링복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궁중 쿠데타가 벌어질 때 무사파의 몸을 짓밟아죽이는데 쓰인 살상도구가 바로 누의 몸뚱아리였어요. 영양이 사바나의 생태계에 얼마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죠.
전세계에 90여종의 영양이 있는데 이 중 70여종이 아프리카에 집중돼살고 있으니 ‘아프리카의 짐승’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아요. 발굽이 짝수인 소의 무리 ‘우제류’에 속해있는데 이 중 가장 진화한 무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제류의 공통 조상격인 에오투라구스(Eotragus)에서 우선 양·염소·면양의 무리가 갈라져나왔고, 다시 소·들소·물소의 축이 분리됐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의 총집합소인 사바나에서 번성할 수 있게끔 최강의 생존력으로 체력을 특화시킨게 영양무리에요. 암수 공히 돋아있는 우람한 뿔과 지구력과 순발력으로 무장한 체력이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공통분모속에서 저마다 크기도 모습도 다른 종으로 분화해갑니다. 꼬여있는 뿔 때문에 번식기 세력다툼하던 수컷들이 뿔이 얽히는 어이없는 자폭으로 유명한 쿠두, 길쭉한 말의 얼굴에 둥글게 뻗어자란 뿔이 인상적인 하테비스트, 두발로 쭉 뻗어 나뭇잎을 뜯어먹는 능력자 게레눅 등이 모두 영양 무리예요. 몸무게가 1000㎏을 거뜬히 넘어가는 괴수 일런드부터, 사람 품에 쏙 안기는 5㎏짜리 수니까지 덩치도 제각각입니다. 이들 모두가 ‘영양’이라는 종족명으로 묶여있죠.
영양의 한자는 ‘羚羊(antelope)’입니다. 하지만 사바나에서 이들의 역할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榮養(nutrition)’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어요. 사바나의 맹수와 포식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영양분 공급원이거든요. 지금 이순간에도 사바나에서는 수만마리의 영양이 사자·표범·리카온·하이에나·악어 등에게 붙잡혀 숨통이 끊어진채로 혹은 산채로 잡아먹히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스피드와 체력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해도 영양은 분명 얼룩말·기린·하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육류 단백질 공급원입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피지컬면에서 한참 딸리는 재칼, 서벌 같은 소형 맹수는 물론이고 개코원숭이, 심지어 평소에는 풀을 뜯거나 간간히 사체의 썩은 고기를 탐닉하는 정도에 불과한 멧돼지까지 사냥에 나서는 시즌이 있습니다. 바로 영양들의 출산 시즌이죠. 종별로 번식시즌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비가 쏟아져 마실 물이 풍부하고 초원이 풀로 우거지는 건기 시즌에 맞춰 출산을 하고, 이 주기에 맞춰 짝짓기가 이뤄집니다. 어미 앞에서 새끼영양을 잡아 그자리에서 잡아먹는 개코원숭이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Leopard Cheetah US Facebook)입니다.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새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은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모든 크고 작은 포식자가 기다려오던 시기예요. 최소한의 에너지만 소비하면서 더없이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고깃덩이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성체 영양고기가 거칠고 질긴 쇠고기 목심이라면, 새끼의 살점은 혓바닥으로도 씹을 수 있을 차돌박이에 빗댈 수 있을 겁니다. 성질머리 급한 포식자들은 아예 출산 중이거나 출산 직전 암컷을 노립니다. 이 경우엔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참상이 벌어지고 맙니다. 종은 달라도 대부분의 영양들은 태어난지 불과 몇분마에 비틀거리면서 일어나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바로 초원을 내달릴 수 있습니다. 생존의 DNA를 통해 그렇게 프로그램된 거예요. 이렇게 태어나는 새끼 영양중 어떤 녀석들은 이렇게 멧돼지에게 잡아먹히고, 원숭이에게 산채로 포식당하고, 재칼의 메인 디시로, 사자의 디저트로 희생이 될 겁니다. 하지만 또 상당수의 녀석들은 어른으로 자라나서 종족 번성의 본능을 수행할 것입니다. 그 잔혹함의 먹고 먹히는 과정을 동력원으로 삼아 생명의 바퀴는 오늘도 우직하게 굴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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