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벌이 애벌레를 사냥해 숙주로 삼고 있다. /페이스북 @Southern Piedmont Natural History

애벌레는 미완의 상징인 동시에 희망의 심벌입니다. 생명의 빛깔인 초록빛을 머금은 애벌레는 더더욱 그래요. 저 꿈틀대는 오동통한 몸뚱이 속에서 훨훨 날개를 펼치며 창공을 날아갈 아름다운 나비(나방)의 꿈이 무르익고 있을 거예요. 이런 모습으로 애벌레를 그린 동화와 만화가 정말 얼마나 많습니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더불어 초·중학교 윤독도서의 쌍벽을 이루던 ‘꽃들에게 희망을’이 대표적이죠. 전설의 포크 듀오 시인과 촌장의 노래 중에도 ‘푸른 애벌레의 꿈’이 있고요. 픽사의 초기작 ‘벅스 라이프’에서도 애벌레는 모자람을 채워가는 희망의 존재로 그려지죠.

나나니 한쌍이 새끼 포식용으로 잡은 애벌레 위에서 짝짓기 하고 있다. /Southern Piedmont Nature History Facebook

문제는 이렇게 나비(나방)의 꿈을 펼치기도 전에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사람 발에 밟혀 짓이겨지기도 하고, 징그럽다는 이유로 돌을 맞아 몸뚱아리가 터져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무의미한 피살과 달리 새나 산짐승의 영양분으로 소비되며 생태계의 동력으로 제 한 몸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피지 못하고 질 운명이라면 최대한 고통없이 신속하게 숨통이 끊기는 게 이 애벌레들을 위한 최대의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그 배려에서도 외면당한 채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희생되는 경우가 오늘 소개해드릴 사진의 주인공입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운영하는 생태전문 소셜미디어 계정 ‘서던 피드먼트 내추럴 히스토리(Southern Piedmont Natural History)’에 올라온 사진입니다.

암컷 나나니가 새끼 포식용으로 붙잡은 애벌레 위에서 수컷과 짝짓기를 하고 있다. /Southern Piedmont Nature History Facebook

머리부터 꼬리끝 날개까지 짙은 아스팔트색으로 빛나는 암수 한쌍의 나나니가 꼬리 끝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 커플이 흘레붙고 있는 아래로 길다란 초록빛의 물체가 보입니다. 우툴두툴 돌기가 돋아있고 옆에는 흰줄이 처져있어요. 애벌레입니다. 땅에 등을 대고 뒤집어져있어요. 애벌레와 암수 나나니, 셋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눕혀있거나 엎어져있네요. 이 기괴한 구도의 사진에선 흘레·포식·산란의 신진대사 현상이 모두 일어났거나 일어날 예정입니다. 나나니 한 쌍이 격렬한 몸짓의 충격을 흡수해줄 푹신한 애벌레 몸뚱이를 잠시 임차한게 아닙니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나뭇잎에 내려앉은 나나니. 허리가 가는 이같은 종류를 '기생벌'이라고 분류한다. /Illinois Departmant of Natural Resources

짧지 않은 삶을 살면서 번식의 본능을 발현할때가 온 암컷 나나니가 수컷과 만나 짝을 짓습니다. 몸통의 끝과 끝을 맞댈때 수컷의 이빨은 암컷의 목덜미를 물어뜯습니다. 이 종 특유의 짝짓기 자세예요. 그렇게 산란 준비를 마친 암컷 나나니가 특유의 번식·육아법을 구현하기 위한 희생충(犧牲蟲)을 물색합니다. 그 레이더망에 이 가여운 애벌레가 포착됐어요. 껍데기 몇번만 벗으면 바로 번데기 모드로 돌입해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정처럼 큼지막한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날아갈 것처럼 보인, 건강하고 당당한 애벌레였습니다. 그 애벌레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암컷 나나니는 연두빛 보들보들한 몸속에 꼬리침을 깊게 주입하고 독액을 투입합니다. 그 순간 애벌레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산송장이 돼버렸어요.

나나니가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고 있다. /페이스북 @Southern Piedmont Natural History

이 산송장이 된 애벌레가 어떻게 나나니의 번식에 활용될지 지옥도가 펼쳐지려는 순간 이번엔 또 다른 수컷이 접근했습니다. 좀 더 우수한 유전자로 산란하려는 종족 번식의 본능이 발현된 것일까요? 산송장 애벌레 위에서 암수가 다시 꼬리를 맞댑니다. 바로 그 순간이 포착된 사진이예요. 애벌레는 어쩌면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중에도 자신 몸뚱위 위에서 몸을 부둥킨 사냥꾼 한 쌍의 기괴한 몸동작을 고스란히 지켜봤을지도 모릅니다. 눈이 마주쳤을 거예요. 나나니들은 “킬킬킬. 애벌레 주제에 뭘 꼬X보나. 미안하지만 지옥은 지금부터 시작이야”라며 조롱과 경멸의 눈빛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생벌의 한 종류인 대모벌이 거미를 번식 숙주로 삼기 위해 사냥하고 있다. /Missouri Department of Conservation

이후의 광경은 이렇게 펼쳐졌을 겁니다. 암컷은 놀라운 근력을 발휘하며 애벌레 몸뚱이를 들고 보금자리로 영차 영차 옮겨갔을 거예요. 그리고 날카로운 산란관을 애벌레의 보들보들한 피부에 쑥 찔러넣고 이번엔 독이 아닌 자그마한 알을 낳았을 겁니다. 얼마 뒤 여기서 부화한 나나니의 알에서 꼬물거리며 부화한 애벌레들은 여전히 숨이 붙어있어 육사시미처럼 싱싱한 애벌레의 초록색살을 야금야금 파먹으면서 성장해나가겠죠.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나니 애벌레들이 변태를 거쳐 성충으로 자라나는 순간까지 희생충 나비 애벌레는 조금씩 자기 살집과 내장을 헌납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마침내 애벌레들이 벌이 돼서 하늘하늘 날아가는 순간까지, 처절하게 야금야금 파먹혔던 애벌레의 몸뚱아리는 휑뎅그렁하게 나뒹굴고 있을 테지요. 나나니의 가까운 친척벌인 고치벌의 보육과 포식에 무참히 희생된 박각시 애벌레의 최후, 그리고 고치벌의 시작을 한 컷에 담은 사진을 보실까요? 잔혹하고 비정하지만 야생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박각시나방 몸을 파먹고 자란 고치벌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돼 우화를 앞두고 있다. /Southern Piedmont Nature History Facebook

이렇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악스럽고 섬뜩한 괴수인 나나니는 전세계 10만여종을 이루는 벌 무리의 하나예요. 벌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꿀벌, 그 꿀벌의 최대의 천적인 장수말벌, 말벌 못지 않은 잔혹한 육식벌인 쌍살벌, 투실투실하고 동글동글한 몸집을 가진 호박벌 등이 먼저 떠오를텐데요. 이 방대한 벌 무리를 분류하는 기준 중 하나가 ‘허리굵기’입니다. 끊어질까 걱정이 되다시피할정도로 가는 허리를 가진 무리들을 상대적으로 고등한 무리로 쳐주는데요. 이 가는 허리 벌들 중에서도 산란관이 그냥 알을 낳는 기능만 가진 무리와 독침의 기능까지 가진 무리로 분류가 돼요.

돌바나방 애벌레 몸을 파먹고 무럭무럭 자란 고치벌 새끼가 우화하고 있다. /Southern Piedmont Nature History Facebook

후자에 속하는 무리가 나나니, 그리고 범 나나니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고치벌과 대모벌이예요. 나나니와 고치벌의 주 타겟이 애벌레인 반면, 대모벌이 즐겨 희생충으로 삼는 건 거미류입니다. 이렇게 다른 벌레를 희생시켜 자기 새끼의 먹이로 활용하는 종류를 기생벌이라고 해요. 이 기생벌들의 특징은 잔혹하다못해 처절한 육아과정속에 어미·아비와 새끼들은 전혀 마주칠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본능에 의해 흘레붙고 살육하며 사냥하고 산란합니다. 처절하고도 섬뜩하지만 동시에 위대한 본능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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