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황정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에서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액터스 하우스에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휴, 창피해서 죽을 것 같네요.” 영화 ‘베테랑2′의 주제곡과 함께 무대에 등장한 배우 황정민(54)은 부끄럽다는 말부터 했다.

지난 4일 오후 부산국제영화제의 관객 대화 시간인 ‘액터스 하우스’ 주인공으로 나선 그는 “저는 배우로 일할 때와 아닐 때는 엄격히 구분하는데, 배우 아닌 인간 황정민은 그저 동네 아저씨”라며 웃었다. 35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쑥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에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이날 대담은 최신작 ‘베테랑2′부터 그의 과거 출연작 뒷얘기 위주로 진행됐다. 7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둔 ‘베테랑2′는 2013년 무렵 그와 류승완 감독이 의기투합하면서 시작됐다. 황정민은 “’베테랑’은 제가 영화 ‘신세계’를, 류 감독은 ‘베를린’을 힘들게 찍은 후에 찾은 단비 혹은 영양제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당시 두 사람은 인천 촬영장에서 잠시 만났다. 황정민은 배우 송지효가 시신인 채 드럼통에 담긴 장면과 적을 삽으로 살해하던 장면을 찍고 있었고, 류 감독은 고된 해외 촬영 탓에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둘은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냐”며 “재밌게 낄낄대며 찍을 수 있는 영화를 해보자”고 했다. 황정민은 “그때의 시작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황정민은 서울예대 재학 중이던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의 단역으로 데뷔했다. 첫 주연작인 ‘와이키키 브라더스’(2000·감독 임순례) 이후, 20년 넘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봉작을 선보였다. ‘소처럼 일하는’ 배우들이 상당수지만, 황정민처럼 주연 위주로 꾸준히 해온 배우는 많지 않다. 황정민은 그 이유에 대해 “작품을 해야 ‘내가 살아있구나, 내가 황정민이구나, 내가 배우구나’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꾸 하다 보면 관성에 빠져 연기를 하기 쉽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 쉬지 않고 도전하는 것이 연극이다. 그는 지난 7월에도 셰익스피어 ‘맥베스’의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황정민은 “연극은 대사 하나하나 장단음까지 대본에 적고 외워가며 공부하기 때문에 큰 훈련이 된다”고 말했다.

그가 꼽는 배우 인생 최고의 명장면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왔다. 백발이 된 주인공 덕수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혼잣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덕수는 아버지와 고된 인생을 떠올리며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라고 울먹인다. 황정민은 그 대사를 잠시 되뇌더니 “아, 울컥하네요”라며 옆 탁자에 놓여있던 생수병을 집어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도 아버지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영화 ‘곡성’(2016) 개봉 때는 아빠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아들을 데리고 극장에 함께 갔다. ‘곡성’에서 무당 일광 역을 맡은 황정민은 중반 이후 등장한다. 상영 시작 1시간이 지나도 황정민이 나오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아들은 “아니, 아빠 언제 나와!”라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황정민은 “놀라서 아들 입을 틀어막았다”며 웃었다. 그는 “아버지로 사는 건 진짜 힘들다. 요즘엔 특히 아들 때문에 아침에 힘들다”며 익살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막역한 지인인 이정재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헌트’(2022)의 북한 장교 역이다. 1983년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를 모델로 한 역할로, 우정출연이라 개런티는 전혀 없었다. 이정재의 전화 한 통에 곧바로 수락한 황정민은 “출연료가 전혀 없었기에 더더욱 잘하고 싶었다”며 “탈북자를 수소문해 북한말 공부부터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출연작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역할은 진짜 잘하고 싶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연기력으로 일찍이 인정받았으나 매번 새롭게 도전하고 성취감을 느껴야 만족하는 배우였다. 한 관객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니, 죽기 전에 연기를 왜 해요? 이 힘든 걸?”이라고 답해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는 “정말 하고 싶은 건 웃기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무명 시절 대학로에서 연극할 때 주인공을 못 맡고 1인8역 같은 멀티 단역을 하면서 익힌 내공이었다. “제가 보기엔 이렇게 무섭게 생겨도 재밌는 사람이거든요. 멀티 역할, 웃긴 역할 잘하는데 영화에서 기회가 없었어요. 웃긴 역할, 저 미친 듯이 잘할 수 있어요.”

멜로 영화에 대한 욕심도 내비쳤다. “사랑은 관객과 소통하기에 너무 근사한 주제잖아요. 사랑은 다 아니까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상처받고. 소통하기에 너무 좋죠. 저 눈은 사랑하는 눈이다, 바로 보이잖아요. 숨소리며 호흡이며. 그래서 좋아하는데 제작이 돼야 말이죠.”

황정민은 “저는 어쨌든 광대로서 여러분들한테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려고 늘 준비하고 있다”며 “더 재밌는 근사한 작품으로 다가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