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는 동물의 왕 중 왕으로 불리니 사냥장면도 으레 멋질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아요. 혀를 내두르게 하는 협업사냥과 전광석화 같은 매복기술로 집채만한 초식짐승을 덮치는 다큐멘터리속 멋진 사냥장면만 선보일 것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이에나가 표범이 잡은 사냥감을 우악스럽게 뺏기도 합니다.

기린 한 마리가 사자들의 집단 사냥으로 쓰러졌다. /페이스북 @Latest Sightings - Kruger

구덩이에서 울부짖는 어린 멧돼지를 끌어내 숨통도 끊기 전에 허겁지겁 먹어치워 멱 따는 소리를 사바나 구석구석으로 전파하죠. 갈기를 성성하게 휘날리는 수사자는 사냥에선 오히려 도움이 안돼 뻘줌하게 기다리는 한심한 백수·한량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오늘 보여드릴 동영상도 우리가 기대하는 사자의 멋진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요.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먹고 살아야 하는 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죠. 남아프리카 크루거 국립공원의 야생포털인 레이티스트 사이팅스(Latest Sighting)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영상부터 우선 보실까요?

기린 한 마리가 사자들의 집단 사냥에 쓰러졌다. /페이스북 @Latest Sightings - Kruger

캔디스와 조엘이라는 사파리 손님이 크루거 국립공원의 프리토리우스콥 쉼터로 이동하던 중에 보게된 상황이에요. 우람한 기럭지와 우아한 몸짓을 자랑하는 ‘초원의 신사’ 기린의 운명이 참으로 고약합니다. 육상동물 중 가장 키가 큰 기린은 덩치만큼 힘도 남다릅니다. 무심코 휘두르는 앞발에 차였다간 어지간한 동물들은 뼈도 못추립니다. 엄밀히 말하면 좀 덩치가 큰 고양이인 사자라고 별 수 없어요. 기린 한마리와 사자 한마리가 1대 1로 맞붙었다면, 기린의 연속된 킥에 사자의 뼈가 우두둑 으스러지면서 곧바로 황천길로 갈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자는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팔팔한 암컷들의 협업으로 먹잇감을 쓰러뜨립니다. 피와 살에 굶주린 암사자떼와 맞닦뜨리는 순간 기린의 생명의 신호등이 노랑으로, 다시 빨강으로 바뀝니다.

남아프리카 크루거국립공원에서 암사자들이 기린을 사냥하고 있다. /The Latest Sightings

개별 피지컬이 기린에게 한참 딸리는 사자들에겐 테크닉도 스피드도 파워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곤 악다구니밖에 없어요. 숫자로 기린을 에워싼 놈들은 졸렬하고 찌질해보이지만 어쩌면 이런 순간 가장 효율적일 수도 있는 방법을 씁니다. 매달리기예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떼를 쓰면서 어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거나 매달리듯 한놈씩 기린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집니다. 사자가 이리도 비굴할까 싶은 생각 이면에는 저렇게라도 먹고 살아야하는 생의 의지가 처절하다는 인상을 갖게 돼요. 이 전략은 기린에게는 불행하게도 딱 맞아떨어지고 말았어요. 필살기인 걷어차기를 해야 하는데 찰떡같이 달라붙은 암사자들의 전략에 말려들고 맙니다.

남아프리카 크루거국립공원에서 암사자들이 집단으로 기린 사냥에 성공하고 있다. /Latest Sightings


기린의 스텝에 힘이 빠집니다.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덮인 똘망똘망한 눈망울에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서리기 시작합니다. 그 공포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면서 기린의 발걸음은 갈수록 더뎌집니다. 그 찰나의 순간을 사자들은 놓치지 않았어요. 타격 포인트를 잡아서 한 놈이 솟구쳐 오르듯 기린의 몸뚱이로 뛰어오릅니다. 그 급습은 최후의 일격이 되고 말았어요. 이 장면에서 모가지가 슬픈 짐승은 사슴이 아닌 기린입니다. 일곱개의 목뼈로 탱탱하게 유지되던 그 거대한 목이 쓰러지는 몸뚱이와 함께 땅으로 내리꼳습니다. “쿵”. 암사자의 찌질하고 졸렬한, 그러나 필사의 공격이 초원의 신사를 쓰러뜨리면서 혼을 빼냅니다. 이 “쿵”소리는 사자들에 있어서는 밥시간을 알리는 환희의 알람이기도 해요. 암사자들의 협업으로 기린이 쓰러지자 풀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새끼들이 몰려나옵니다. 어미들이 기진맥진한 사이 만찬이 시작됩니다. 기린의 피로 적신 사자새끼의 천진난만한 얼굴 표정은 대자연이란 이런 것임을 말해줍니다.

새끼사자가 어미가 사냥한 기린을 먹으려 하고 있다. /Latest Sightings

이처럼 사자들의 한낱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지만 기린은 기본적으로 초식동물 중에서는 강자에 속합니다. 주로 발굽이 짝수인 초식동물들의 무리인 우제류에 속해요. 그러니까 소·영양·돼지·낙타·하마 등과 육촌 뻘이죠. 기린의 조상은 팔레오트라구스라고 불리는 고대 포유류인데 몸뚱이는 말과, 얼굴은 기린과 닮았고, 뒷다리에는 얼룩무늬가 나있어요. 여기서 목만 쭉 잡아당기고 촘촘한 그물무늬를 입힌 것처럼 진화한게 오늘날의 기린이예요. 반면 그 중 일부는 조상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중부 아프리카의 빽빽한 열대우림속으로 들어갔어요. 아프리카의 모든 야생동물을 통틀어 정말로 보기 어렵다는 전설의 기린 사촌 오카피가 바로 요놈들입니다.

미국 휴스턴 동물원의 오카피 어미와 새끼. /KHOU 11 News

꺽다리로 변모한 기린은 발아래부터 머리꼭대기까지의 높이가 6m에 육박하니 키로써 이를 따를 짐승이 없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마저 키가 2m에 육박해요. 바로 NBA 입단테스트를 받을법한 기럭지죠. 50㎝에 이르는 혀를 날름 내밀어서 아카시아나 미모사의 잎을 우두두둑 뜯어먹습니다. 이 짐승이 초식이 아닌 육식이라고 상상을 해보세요. 사바나에는 차원이 다른 지옥도가 펼쳐졌을 것입니다. 사람과 똑같이 일곱개의 뼈로 구성돼있는 기린의 트레이드마크 기다란 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무기입니다. 여느 짐승들처럼 수컷들끼리 영역다툼을 할 때 힘겨루기를 하는데요. 공주님의 티아라마냥 앙증맞게 달려있는 뿔 대신 이들은 기다란 목을 휘두르며 승부를 가립니다. 이를 네킹(necking)이라고 하는데요. 퉁 퉁 소리가 모니터를 찢고 들려올것만 같은 네킹 장면을 한 번 보실까요?

기린 두 마리가 목을 휘두르며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페이스북 @South African National Parks

워낙 다리가 길고 덩치카 크다보니 달리는 모습은 엉거주춤해보이는 것도 같지만, 성큼성큼 걸어가듯 달려도 거뜬히 시속 50㎞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덩치에 파워에 유연성까지 갖춘 기린은 성체가 되면 적수가 거의 없어요. 하지만 이처럼 굶주림에 따른 식욕으로 눈이 뒤집힌 암사자들과 만난다면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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