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달이 드렁허리를 잡아먹고 있다. /인스타그램 @octaviocampossalles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제일 빠르다’. 살면서 언젠가 한번은 들었을 말입니다. 입시·취업·자격증 시험 등 숱한 도전의 문턱에서 좌절할 때 이 말을 되새기며 심기일전해서 목표를 이뤘다는 이야기도 제법 들려오죠. 그런데 이 멋진 격언은 사실 인간에만 해당되는 내용이랍니다. 순간의 방심으로 먹고 먹히는 야생 세계에서 승자의 뱃속으로 사라지며 패자가 되어버린 희생물들의 스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한 번 지각은 영원한 아웃입니다. 몸부림치고 저항해봐야 덧없을 뿐이죠. 그 부질없는 저항의 순간을 생생하게 담은 동영상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왔어요. 브라질과 칠레에서 활동하는 생태사진가 겸 생태투어 운영자 옥타비오 캄포스 살레스(Octavio Campos Salles)는 투어 도중 왕수달의 먹방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해냈습니다. 우선 동영상부터 보실까요?

왕수달이 드렁허리를 잡아먹고 있다. /인스타그램 @octaviocampossalles

뱀처럼 보이는 먹잇감은 우리나라 논두렁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민물고기 드렁허리입니다. 이 동영상에 어울리는 BGM은 어쩌면 변진섭의 ‘너무 늦었잖아요’나 캐롤 킹의 ‘It’s too late’일지 모르겠어요. 눈코입과 아가미가 달린 머리통을 포함헤 제몸의 3분의 1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수달의 뱃속으로 넘어갔는데도 살겠다고 끝까지 버둥거리는 최후의 몸부림치는 드렁허리에게 ‘너무 늦었다’고 말해주고 싶거든요.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을 귀조차 왕수달에게 뱃속에서 소화가 되고 있을 겁니다. 왕수달의 공격이 너무나 전광석화같아서 드렁허리의 남은 몸뚱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상 최대의 수달인 남미 왕수달이 드렁허리를 잡아 머리부터 산채로 먹어치우고 있다. /octavio campos salles instagram 동영상 캡처

운이 좋아 저 남은 몸뚱이가 수달의 발톱을 빠져나간다 한들 결국은 꿈틀대는 고깃덩이, 산송장일 뿐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절개부분이 스멀스멀 살아날리 만무하죠. 희대의 사냥꾼 왕수달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놈은 악다귀처럼 드렁허리의 남은 몸뚱이를 틀어쥐고 그 날카로운 이빨로 끝까지 아작 아작 씹어먹었을 겁니다.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드렁허리의 꼬리지느러미는 펄럭일테고요. 다 자라면 머리·몸통·꼬리길이를 합쳐서 2m가 훌쩍 넘는 왕수달은 수달 뿐 아니라 족제비과를 통틀어 최강의 피지컬과 전투력을 갖춘 동물입니다. 족제비과의 괴물전사로 유명한 북미대륙의 울버린과 1대1로 맞닥뜨려도 꿀리지 않을 거예요. 우람한 덩치와 흡혈마귀같은 이빨, 부릅뜨고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매를 보면 괴수중의 상괴수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계 최대의 설치류인 남미 카비파라가 서식지에서 헤엄치고 있다. /southamerica.travel

이는 수달에만 해당되는게 아녜요.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남미의 숲과 늪지대는 덩치와 전투력에서 내로라하는 괴수들의 집합처입니다. 같은 짐승이라도 아마존 등 남미에 사는 종류는 유난히 덩치가 큰 괴수의 풍모를 갖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같은 종류의 동물이라면 추운 곳일수록 덩치가 크고, 더운 곳일수록 몸집이 아담하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기도 해요. 아마존과 주변 지역에서는 왜 많은 동물이 메가톤급이 되는지는 흥미로운 연구주제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메가 괴수들은 또 어떤게 있을까요? 아마존의 터줏대감 아나콘다를 어찌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몸길이가 9m까지 자라는 아나콘다는 지금도 현장을 탐험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던 신종이 보고되고 있어요. 다시 말해 9m가 최장 몸길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남미가 원산지인 세계 최대의 민물고기 피라루쿠. /Milwaukee Zoo

이런 괴물들과 물에서 세력다툼을 하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물고기들도 ‘덩치’로 승부스를 던졌습니다. 그들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물고기 ‘피라루쿠(아라파이마)’예요. 피라루쿠의 다 자란 몸길이는 5m 안팎에 이릅니다. 덩치가 큰 만큼 행동반경은 넓지 않고 움직일 때 유연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 몸보다 반절밖에 안되는 왕수달이 감히 넘볼 수는 없습니다. 강하지 않을 바에야 크기라도 해야 생존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아마존에서는요. 만만한 짐승의 대명사 쥐도 이 동네에서는 한껏 덩치를 키우는 생존전략을 택했어요. 아마존이 거대 쥐들이 낙원이 된 까닭입니다. 대형 쥐 4대 천왕인 카피바라(몸길이 1.3m), 마라(80㎝)·아구티(52㎝)·뉴트리아(1m)가 모두 남미산입니다. 뱀과 수리와 재규어의 이빨과 발톱을 벗어나 생존율을 높이려면 결국 덩치로 승부하는 수 밖에 없거든요.

카이만이 재규어에게 사냥당했다. 남미가 원산지인 카이만은 여느 악어에 비해 덩치가 많이 작다. /Journey with Jaguars Youtube 캡처

이 같은 남미 거대화의 흐름은 등뼈가 없는 무척추동물에게도 적용됩니다. 지상 최대의 지네로 알려진 아마존 왕지네는 통상 전체 몸길이가 30㎝에 이르고, 심지어 42㎝짜리가 발견된 적도 있습니다. 통상 지네는 파충류나 새의 밥으로 희생되지만, 덩치는 통념마저도 바꿔버렸어요. 주식은 도마뱀·두꺼비·쥐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남미에서 거대화되는 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외가 바로 악어입니다. 남미의 악어인 카이만의 경우 가장 큰 검정카이만도 다 자란 몸길이가 4.6m이고, 가장 작은 종류인 눈꺼풀카이만은 1.5m에 불과해요. 악어인지 도마뱀인지 헷갈릴 정도죠. 이렇다보니 카이만은 북미의 앨리게이터나 아프리카·호주의 크로커다일처럼 덩치와 포악함으로 일대 최대의 포식자로 군림하기는커녕 왕수달과 아나콘다의 눈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신세입니다. 늪의 제왕 악어마저 이 남미 거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면 생태계가 어떤 카오스에 휘둘렸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자정능력에 늘 탄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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