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에서 언더독의 반란에 열광하고, 가요 차트에서 무명 가수의 돌풍에 환호하는 것처럼, 야생에서 약자의 반격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악어를 짓밟아 그자리에서 핸드백 재료로 만드는 코끼리의 발길질, 사자 목덜미를 뿔로 꿰뚫어 피범벅으로 만드는 물소의 죽음의 피어싱은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선사합니다. 그런 약자의 반란 장면이 포착됐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가시돋친 몸뚱이의 주인공인 산미치광이(호저·豪猪)입니다. 한자 이름에 ‘돼지 저’를 쓰다보니까 돼지의 종류로 간혹 오인받고 있지만 쥐의 일파인 설치류입니다. 야들야들한 쥐고기로 배를 채우려던 표범이 어떻게 한 방 먹는지 우선 최근 올라온 동영상(Latest Sightings Facebook)부터 보실까요?
찰나의 반격, 전광석화의 역습이었어요. 표범이 산미치광이의 몸뚱이를 덮치려는 순간에 빛의 속도로 역습이 이뤄집니다. 후드드드득... 순식간에 수십개의 가시가 떨어져 표범의 얼굴과 몸뚱이에 박힙니다. 표범 얼굴이 밤송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놈이 사방에서 내리꽂힌 가시를 얼마나 신속하게 제거하느냐, 그 뒤 상처를 얼마나 빠르게 봉합하느냐에 따라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될 거예요. 표범은 고양잇과입니다. 그러니 쥐가 고양이를 이기며 죽음으로 한발짝 가까이 몰아넣었네요. 이 짜릿한 순간을 돌아보면서 산미치광이는 이렇게 포효할지도 모르겠어요.
“머저리 같은 점박이 고양이놈아. 아프냐? 아프다고? 그래. 죽을 때까지 아파해보거라. 내 백어택 맛이 어땠느냐. 이제 네놈이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 알려주마. 네 놈 몸뚱이엔 최대 50㎝에 이르는 가시가 숭숭 박혀있다. 속이 텅 비어있지만, 끝은 날카롭게 벼려진 나의 가시가 네놈의 몸뚱이를 파고든 자리에 병균들이 스멀 스멀 들어올 것이다. 그 병균들은 살가죽을 파고들며 조금씩 죽음의 드림자를 드리우겠지. 그래서 어지간한 맹수들은 날 건드리지도 않는단 말이다. 무리에서 쫓겨나고 사냥도 힘들어진 노쇠한 사자나 하이에나들이 배고픔에 눈이 돌아 나를 덮쳤다 찔려죽는 일이 허다하단 말이다. 그런데도 나에게 달려든 걸 보니 네놈은 무식하거나 용감하거나 가련하거나 미쳤거나 넷 중의 하나로구나. 크홧홧홧홧!”
“이게 무슨 곡절인지 네놈은 아직도 어리둥절하겠지? 우리 산미치광이족은 거친 사바나에서 네놈들 같은 맹수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묘책을 냈다. 털을 가시로 변신시킨 것이지. 거친 황야일수록, 우리를 노리는 적들이 많아질수록 덩치는 더욱 커졌고, 가시도 무성해졌다. 이 가시의 비밀을 알려줄까? 건드리는 순간 툭 빠지면서 끄트머리가 보드라운 살집을 푹 찌르고 들어가도록 설계 돼있다. 네놈 같은 머저리들이 우리를 건드렸다 혼쭐이 나도록 말이지. 우리에겐 가늘고 짧은 앞가시(quill)와 훨씬 큰 뒷가시(spine)이 있지. 무엇이 꽂히더라도 치명상을 입히기는 마찬가지만, 아무래도 뒷가시의 파괴력이 크단 말이다. 내가 지금 네놈을 백어택으로 한 방 먹인 이유이기도 하지. 그럼 왜 가시는 등에만 돋고 배에는 없는지 궁금하다고? 우리도 피끓는 짐승인데 흘레는 붙어야 하지 않겠느냐. 껄껄껄껄.”
“우리 족속은 설치류 세계에서 덩치로 치자면 아프리카·아시아 리그에선 금메달이지만, 월드리그에선 카비파라와 비버에 이어 동메달급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덩치만 산만할 뿐 겁쟁이들이라 우글우글 몰려살면서 아나콘다와 재규어의 먹거리로 전락해버린 소심한 카비파라놈들, 세상에 할줄 아는 거라곤 나무갉아서 쓰러뜨린 뒤 물가에 쌓아두는 것 밖에 모르는 기괴한 편집광 비버놈들과 달리 우리는 무기를 갖고 싸워서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천적들을 쓰러뜨릴 줄 안다. 우린 쥐새끼들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설치류 가문의 자랑이자 영웅이란 말이다”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처럼 가시를 돋은 다른 짐승들인 고슴도치와 가시두더지와 비교당한다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놈들은 덩치가 작은 고슴도치와 가시두더지를 설치류로 착각하더구나. 고슴도치는 식충류인 두더지에 가깝고, 가시두더지는 오리너구리와 같은 단공류인데도 말이다. 인간놈들은 작고 저들 눈에 귀엽다는 이유로 고슴도치를 게임 캐릭터로 만들고, 가시두더지를 올림픽 마스코트로 만들기도 했지. 반면 우릴 보고는 징그럽고 무섭다며 눈을 흘기더군. 가련한 놈들. 내 비록 고슴도치 새끼처럼 함함하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외모가 무슨 상관이더냐. 먹고 먹히는 이 거친 세상에서 강하고 드센 놈이 살아남는 것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더냐. 그래서 네놈도 날 먹으려다 이런 꼴을 당한게 아니었더냐, 이 가련한 점박이 고양이놈아.”
“네놈 어찌될지 알려주마. 살과 근육을 찌르는 고통 속에 세균이 온몸에 독버섯처럼 퍼져서 쓰러질 때 죽음의 냄새를 맡은 네놈의 문드러진 피와 살을 뜯어먹기 위해 대머리수리들이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몰려앉을테지. 사바나 언덕 저편에서 재칼도 달려올 것이다. 네놈의 점박이가죽이 대머리수리 부리와 발톱에 들춰지고 내장과 피와 살과 너덜너덜한 근육이 재칼 이빨에 뜯겨나가고, 썩은 곰팡내가 진동하는 뼈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 바로 그 때, 네놈과 나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리도 설치류의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라는 앞니를 멍에처럼 달고 다닌다.”
“무엇이든 쏠아서 갈아야 하는 운명인 바! 그러나 우리는 보통 쥐가 아니다. 혼이 빠져나가고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사라진 뼈를 갉는단 말이다. 나뭇가지나 갉아먹는 여느 설치류 쥐새끼들과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천형 같은 앞니를 닳게 하는 동시에 뼈에 가득한 인과 석회같은 물질을 섭취하지. 이렇게 먹는 영양분은 우리의 가시가 돼 든든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어찌 뼈만 갉아먹겠느냐. 군데 군데 끼어있는 피와 살의 찌끄레기도 갈빗살 훓듯 쪽쪽 빨아주며 곰삭은 감칠맛을 즐길 터이다. 그러다 망막이 말라서 핏줄만 늘어붙은 네놈의 퀭한 눈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내 윙크라도 날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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