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예각이 치즈 조각을 연상시키는 도산대로의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Iwan Baan, 송은문화재단 제공

지난 2018년 송은문화재단의 신사옥 계획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설계를 맡은 자크 헤르조그는 “도산대로에 영감을 받을 만한 좋은 건축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도발적 발언에 한국 건축가들의 심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나,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헤르조그라면 그 정도 말할 수 있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 뫼롱 2인조의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이하 HdM)은 과도한 형태와 스펙터클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연출자도 아니고, 한때의 유행을 의식하는 포퓰리스트도 아닌, 분명한 자기 이론과 감각을 겸비한 ‘찐’ 건축가 듀오다. 건축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2001)도 지금의 그들을 수식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HdM의 한국 첫 작업인 송은문화재단 신사옥이 지난달 30일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은 HdM이 앞선 발언으로 암시한 것처럼 ‘하던 대로 해온 도산대로식 건축 문법’을 합법적이고도 창의적으로 일탈하고 있다.

송은문화재단 신사옥을 확대한 모습. 프리츠커상을 받은 스위스 건축가 듀오‘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의 국내 첫 작품이다. 법규의 제약을 적극적으로 역이용한 결과 주변의 건물들과 차별화되는 날카로운 사선 디자인이 도출됐다. /ⓒIwan Baan, 송은문화재단 제공

많은 사람이 치즈 조각 같은 삼각형 형태를 먼저 주목하지만 이보다 HdM의 건축 언어를 더 잘 드러낸 것이 송판 거푸집을 사용해 건물의 표면에 새긴 소나무 문양이다. HdM은 과학자처럼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서 건축을 시작하곤 한다. 자연을 건축의 거대한 형태뿐 아니라 표면의 작은 패턴으로 가져오는 데 능숙하다. 허브 캔디로 잘 알려진 스위스의 리콜라 창고를 설계할 땐 허브 잎 패턴으로 건물 한 면을 채웠고, 베이징올림픽 경기장은 작은 새 둥지를 거대한 건축의 구조로 재해석했다.

이런 그들에게 한국을 상징하는 소나무나 ‘숨은 소나무’라는 송은(松隱)의 문학적 의미는 이채로운 소재였을 것이다. 가까이 가면 햇빛을 받아 은빛 비늘처럼 일렁거리는 소나무 문양의 향연을 느낄 수 있다. 지상 11층에 8000㎡ 규모라면 도산대로에서는 철골로 뼈대를 짜고 투명한 유리를 붙이는 것이 건축적 정석 아니었던가?

건물을 삼각형으로 만든 뒤쪽 사선은 국내 건축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HdM은 법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다루며 날선 건물의 형태를 찾아냈다. 날카롭고도 안정적 비례를 뽐내는 이 오면체 건물의 자태를 보면 건물을 육면체로만 바라봐온 우리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게 된다.

1층 로비에서 나선형의 벽면을 거쳐 이어지는 지하 2층 전시장. 우물이나 동굴의 깊은 어둠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Iwan Baan, 송은문화재단 제공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1층 로비와 지하 2층 전시장을 연결하는 뻥 뚫린 공간 외에는 내부에서 새로운 일탈이 느껴지지 않는다. 2~3층에 비영리 전시 공간 ‘송은(SONGEUN)’을 뒀지만, 주어진 기능을 착실하게 풀어낸 정도다. 내부에서 주목할 곳은 오히려 주차장인 지하 1층을 건너뛰고 지하 2층에 조성한 전시 공간이다. 1층 로비에서 지하 1층 주차장을 나선형 벽면으로 가리면서 지하 2층에 이르는 이 공간은 관념과 시각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깊은 우물이나 동굴과 같다. 미술관에 등장하는 이런 공간은 보통 천창을 둬서 드라마틱하게 빛을 유입시키거나 확장감을 주지만, 송은문화재단의 이 공간은 아주 묵직한 두께의 어둠 속으로 사람들을 깊이 빨아들인다.

도산대로와 인근 청담동 명품 거리엔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소비를 부추기는 공간들이 즐비하다. 투명한 유리로 거리에 열려 있는 것처럼 보여도 차림이 남루하거나 명품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다면 쉽게 들어설 수 없는 곳들이다. ‘전시장’이나 ‘플래그십 스토어’라고 이름 붙어 있어도 우리 모두를 환대하지 않는 고급스러운 매장일 뿐이다. 송은문화재단 신사옥은 이런 노출과 호객에 지친 도산대로를 담담하게 위로하는 문화의 단단한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