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퐁피두 센터’, 런던 ‘로이드 빌딩’ ‘히스로공항 제5 터미널’ 등을 설계한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88) 경이 18일(현지 시각)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족은 이날 “로저스가 자택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인은 공개하지 않았다.
로저스는 첨단 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건축 재료와 시공법을 실험한 ‘하이테크 건축의 거장’으로 불린다. 2007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기도 했다. 60여 년간 도시를 캔버스 삼아 현대 건축의 풍경화를 쓴 그는 “도시는 우리 문화의 심장이자 경제의 엔진이며 문명의 발상지”라고 늘 강조했다.
최첨단 마천루로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주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꾼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근엔 서울의 경관도 그에게 빚졌다. 작년 완공돼 서울의 새 랜드마크가 된 여의도 ‘파크원’이 그의 작품이다. 파크원은 53·69층 오피스 빌딩 두 동과 ‘더 현대’ 백화점 등으로 구성된 대형 복합 문화시설. 건물 테두리를 두른 붉은색은 한국의 단청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로저스는 1933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제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무솔리니의 독재를 피해 1938년 영국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 난독증을 심하게 앓아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난독증 환자의 한 가지 이점은 과거를 돌아보며 어린 시절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더니즘 건축으로 유명했던 런던 AA스쿨(영국건축협회건축학교)에 입학하면서 건축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미국 예일대에서 건축 공부를 이어가면서 하이테크 건축을 함께 이끈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를 만났다.
출세작은 1977년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84)와 함께 만든 퐁피두 센터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건축물 내부 시설과 철골, 에스컬레이터 등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한 파격적 디자인이었다. 설계안을 낼 때 첫 번째 문장은 “모든 사람·모든 연령·모든 신념을 초월해 사랑받는 장소, 대영 박물관과 타임스스퀘어를 합친 곳”이었다. 마치 내장이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 때문에 초반엔 에펠탑만큼이나 큰 논란을 낳았다. 로저스는 훗날 “개관 직후 센터 앞에서 만난 한 파리 여성에게 내가 이 건물 건축가라고 했더니 우산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더라”면서 웃지 못할 일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또 다른 대표작은 런던 로이드 보험의 사옥인 ‘로이드 빌딩’. 내부 공간은 비워두고 엘리베이터, 계단 등 6개 타워를 분리해 외부에 배치한 형태였다. 로저스는 “퐁피두가 거대한 광장에 서 있는 놀이공원이라면 로이드 빌딩은 런던의 중세풍 거리에 끼워 넣은 민간 클럽”이라고 비유했다.
방탄소년단(BTS) 등이 콘서트를 펼친 영국 그리니치의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도 로저스 작품. 초반엔 천막 구조 위에 삐죽삐죽 솟은 구조물 때문에 ‘텔레토비 집’이라고 혹평받기도 했다. 한때 그의 건축에 찰스 왕세자가 맹공을 퍼붓기도 했지만, 1991년 영국 왕실은 현대 건축에 미친 그의 지대한 영향을 높이 평가하면서 기사 작위를 내렸다.
2007년 로저스는 프리츠커상을 받으면서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했다. “역사란 모든 일이 다 지난 다음에야 명료해진다(History looks sunlit, clear, and obvious only in hindsight). 나를 포함해 모두의 경력도 마찬가지다.” 여든여덟 해의 삶이 다 지나간 지금, 건축계는 그를 주저 없이 ‘전설’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