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부암동에 있는 자택 마당에 선 건축가 최욱. 그의 집은 ‘사유의 방’ 주택 버전 같다. 기능별로 쪼갠 작은 공간 네 채가 뚝뚝 떨어져 있다. 뒤로 보이는 공간은 명상을 위한 한 칸짜리 다실이다. /박상훈 기자

1500여 년 전 탄생한 사유(思惟)의 형상을 인증샷으로 사유(私有)하려는 이들이 넘쳐난다. 석 달간 다녀간 관람객만 20여만명.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열기가 뜨겁다.

새로운 형태의 전통 즐기기 현상엔 국보 두 점의 랑데부를 극적으로 연출한 공간의 힘이 컸다. 잡념을 빨아들이는 명상 블랙홀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최욱(59·원오원아키텍츠 대표). 30여 년간 담백하고 정갈한 한국적 건축미를 재정립한 건축계 간판스타다. 두가헌, 학고재 갤러리 등 북촌 한옥을 현대적으로 개조해 ‘동네 건축가’로 명성을 쌓았고,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 3관,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 등 굵직한 기업 프로젝트로 보폭을 확장했다. 재벌 오너들의 고급 주택 단골 건축가라 비공개 작품 리스트가 더 많은 건축가이기도 하다.

별명은 수도승. 초저녁에 잠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나 독서한다. 자칭 ‘은둔형 건축가’를 만나러 서울 부암동 집으로 갔다. 산자락 끝 한국선 좀체 없는 북향 집이 나타났다. 기능별로 쪼갠 작은 집 네 채가 뚝뚝 떨어져 있다. 한옥을 개조한 살림집이 1호, 아내(미술가 지니 서)와 함께 쓰는 작업실이 2호, 오두막 같은 서재가 3호, 한 칸짜리 다실이 4호다.

-집이 명상 공간 같다. ‘사유의 집’인가(웃음).

“일이 없으면 거의 집에 틀어박혀 있다. 그래서 집에서 보이는 풍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20년 전쯤 산비탈에 응달진 북향이라 아무도 관심 없던 이 땅을 샀다. 무지 쌌다(웃음).”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몸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이자, 개인이 소유하는 유기적인 보호체.”

-’사유의 방’이 무척 인기다. 특히 MZ세대에선 ‘불상 보고 멍 때리기’를 줄인 새로운 ‘불멍’이 생길 정도로 국보가 아이돌급 인기를 끈다.

“반가사유상이 글로벌 수퍼스타가 되기 위해선 한국 젊은 세대부터 즐겨야 한다고 봤다. ‘고루한 전통’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그들의 감수성을 훅 파고들 ‘쿨한 전통’이 뭘까 고심했다.”

-쿨한 전통을 보여준다?

“요즘 한국 MZ세대는 디자인·건축에서 세계 최고의 취향을 지녔다. 촌스럽지 않게 전통을 느끼게 해주는 게 필요했다. 박물관 하면 떠오르는 관공서 느낌부터 지웠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공감각적으로 젊은 세대의 DNA에 숨은 한국성을 일깨우자고 생각했다. 예컨대 빛을 흡수하는 재료인 흙과 숯을 전시장 메인 홀과 입구 벽에 발라 은은한 느낌을 주고, 계피 향을 입혀 후각을 자극했다. 다보탑⋅석가탑이 나란히 있는 불국사 감성도 심었다.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탑돌이하듯 돌더라.”

-딱 최욱 같은 공간이라고들 하더라.

“그런가(웃음). 반가사유상하고 10여 년 만에 재회했다. 2009년 미국 LACMA(LA 카운티미술관) 한국관 재개관 특별전 때 반가사유상 등 한국 유물 100여 점이 전시됐다. 그때 유물장을 디자인했다. 이번엔 박물관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두 불상을 동시에 놓는다, 유리 케이스에 넣지 않는다. 풀기 어려운 고차방정식이었다. 어느 날 어린 시절 소극장에서 본 연극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소극장에서 맨눈으로 관객이 배우를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최대 거리가 24m다. 사유의 방 길이를 24m로 한 이유다. 한옥 마당 크기와도 비슷하다.”

-한국적 구도를 생각했다고?

“서양의 대표적인 시각 체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에 적용된 일점투시 원근법(하나의 소실점에 수렴하는 구도)이다. 우리 눈을 왜곡해 만든 구도다. 사유의 방에선 서양 시각 체계를 깨고 싶었다. 초점을 두지 않고 공간 전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일부러 두 불상의 시선이 틀어지게 배치했다.”

-최욱이 생각하는 좋은 공간이란.

“눈 감았을 때 기분 좋은 공간.”

-30년간 현장에서 피부로 느낀 변화가 있는가.

“유학(이탈리아 베네치아 건축대학)하고 1989년 귀국했더니 ‘외국 같다=세련됐다’는 인식이 뿌리 깊었다. 설계가 맘에 들면 건축주가 ‘외국 느낌이 난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요즘엔 ‘한국적이다’라는 말이 칭찬이 됐다.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보니 ‘차별화된 한국의 미학(Distinctive Korea)’ 개념을 강조하더라. 과거엔 해외를 모방했지만 이제는 한국성에 기반을 둔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경쟁력을 지닌다는 얘기다.”

-한국다움의 요체가 뭐라고 보나.

“병치(竝置)의 미. 계산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툭툭 더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아름다움이다. 비빔밥을 보자. 재료가 입속에서도 각자 맛을 주장하면서 어우러진다. 한국 건축도 그렇다. 건물⋅정원⋅담장이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까지 슬쩍 지붕을 침범하며 공존한다. ‘이날치밴드’ 같은 국악 밴드를 봐도 소리와 율동이 턱 겹쳐지며 특유의 한국 감성이 나온다.”

-4년 전 세계적 권위의 이탈리아 건축 잡지 ‘도무스’ 한국판을 출간했다.

“한국적 미감을 아카이브로 체계화해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와비사비(わびさび·투박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뜻하는 일본어)’ ‘젠(禪)’ 등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문화인데 일본이 단어를 선점함으로써 서구에선 일본 문화가 돼 버렸다. 한국어를 통한 문화 선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매호 주제어를 ‘안팎(Anpak)’ ‘비빔(Bibim)’ ‘땅(Ttang)’ 같은 우리말로 정하고 영어 표기를 했다.”

-집안 곳곳에 책이 눈에 띈다.

“책은 언어로 구축하는 건축이며, 건축은 물질로 사고하는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책을 꼽는다면?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 모옌의 ‘열세 걸음’, 티치아노 테르차니의 ‘네 마음껏 살아라’.”

-책 말고 영감을 얻는 사물은 없나.

“거미줄. 거미는 자연의 건축가다. 그리고 모닥불. 장작 각도에 따라 불꽃 모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인생의 빛깔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