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트리스 게임 속으로 뛰어든 듯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공중에 달린 네모난 공간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다. “고정관념 출입 불가”라고 선언하는 듯한 파격 디자인. 지난해 7월 포항 남구 포스텍 캠퍼스 안에 문을 연 ‘체인지업 그라운드 포항’이다. 포스코가 지원해 만든 창업지원센터로 스타트업 78개가 입주해 있다.
이 ‘테트리스 빌딩’의 설계자는 장윤규(58·국민대 교수) 운생동건축사무소 대표. 홍익대 대학로 캠퍼스, 성수문화복지회관 등 조형적인 건축물을 설계해온 유명 건축가다. 실리콘밸리의 환상에 젖어 스타트업 하면 으레 실험적 디자인의 사무실을 떠올리지만, 막상 건축가가 예술적으로 설계한 창업센터는 국내에 드물다.
“스타트업은 말랑말랑한 아이디어를 이제 갓 구워내는 단계에 있는 기업이다. 고정관념이라는 중력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라는 의미를 담아 ‘사고의 무중력 상태’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장윤규는 “공간을 허공에 띄운 듯한 구조로 건물의 육중함을 덜어낸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플로팅(Floating) 건축’.
2층 로비부터 7층 천장까지 32m를 뻥 뚫어 만든 아트리움(중앙홀)에 이런 건축가의 철학이 응축해 있다. 이곳을 향해 투명 박스형 회의실 8개가 불규칙적으로 툭툭 튀어나와 있다. 장윤규는 “창업센터는 스타트업이 모인 작은 마을”이라며 “다른 스타트업과 교감하며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과정이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회의하는 풍경도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휴식의 질도 신경을 썼다. 박스 사이에 생긴 공간을 포켓 공원(도심 속 작은 공원)처럼 활용했다.
우물처럼 깊은 아트리움은 용광로를 상징하기도 한다. “포스코의 용광로가 철을 녹여 쇳물을 만들고 철판과 소재라는 물질을 만들어낸다면 이곳은 영감·네트워크·소통이라는 무형의 정신을 녹여 창의성을 빚는 용광로”라고 설명했다.
내부 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파사드를 만든 결과, 건물 외관도 범상치 않다. 전체적으로 가운데가 오목한 호리병 형태인데 여기저기 블록을 밀어 넣은 듯 요철이 생겼다. “철을 두른 거대한 우주선이 착륙한 형상을 염두에 둔 디자인”이라고 했다.
건축가 장윤규에겐 ‘형태주의자’라는 수식이 따른다.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이목을 끌지만 유행 타는 건물을 만든다는 비판도 받는다. 장윤규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직접 건축물다운 건축물이 거의 없는 지방 도시에 제대로 된 랜드마크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며 “삭막한 지방 도시엔 조형적 건축이 생기를 불어넣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건축 실험의 핵심은 “상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것이었다. “‘박스형 건축’이란 표현이 진부한 건축을 상징하는 말처럼 사용된다. 박스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건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방을 해체해 재조합한 듯한 디자인이 나온 배경이다.
반짝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30년 전 설계사무소에 다니면서 서울 상도동 6평(약 20㎡)짜리 원룸에 살았다. 거기에 ‘건축실험아틀리에’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밤마다 혼자 각종 실험을 했다. 박스 조합형 건축도 하나였다.” 우연하게도 이번 건물에서 공중에 뜬 박스 하나의 크기는 20㎡ 안팎. 20대 때 건축 실험을 했던 원룸 크기와 같다.
“어쩌면 제 인생 자체가 스타트업이다. 밑천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하면서 건축했으니까. 그때 지인이 그러더라. 실험 그만 하고 실현을 하라고. 이번에 그 꿈이 이뤄졌다.” 30년 만에 ‘네모의 꿈’을 이룬 건축가가 해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