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 /사진가 강민구

지난 1일 오후 서울 ­­­이태원 경리단 뒷골목. 한때 장진우 셰프가 운영하는 식당이 몰려 있어 ‘장진우 거리’라 불린 골목이다. 오후 4시. 한적했던 거리에 활기가 돌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골목 끝 범상치 않은 건물 뒤로 줄을 섰다. 잠시 뒤 출입문이 열리자 수십 명이 차례로 입장했다.

유명 식당도, 카페도 아니다. 지난달 문 연 그래픽 노블 전문 서점 ‘그래픽’. 2018년 유료 서점 모델을 제시한 일본 롯폰기 ‘분키쓰(文喫)’ 서점처럼 입장료(1만5000원)를 내야 한다. 돈을 내고 서점에 들어간다? 한산할 것 같지만 주말엔 오픈런(문 열자마자 달려가는 것)까지 펼쳐진다.

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 /사진가 강민구

신생 서점이 한 달 만에 인스타그램을 정복한 핫플레이스가 된 이유? 일단 ‘공간’의 힘이다. 원기둥 4개를 쌓은 뒤 4분의 1로 잘라낸 듯한 형태, 간판은 고사하고 창문 하나 없이 성곽처럼 내부를 꽁꽁 감싼 외관. 인증샷이 일상인 MZ세대의 레이더가 놓칠 리 없다. ‘조각 케이크’ ‘소라 빌딩’ ‘경리단 구겐하임’ 같은 애칭이 붙었다.

서점을 설계한 이는 건축가 김종유(46·오온 건축사사무소 소장). 디자인의 출발은 할아버지 유품인 낡은 사전이었다. “책을 쌓아 올린 외형을 생각하는데 오래된 사전의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도예작가 문평과 협업해 낡은 사전의 책장(冊張)처럼 결이 살아있는 세라믹 외장재를 만들어 건물 안팎에 붙였다. 가까이서 보면 주름 종이처럼 오돌토돌한 질감이 느껴진다.

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의 모티프가 된 사전. 건축가 김종유가 간직한 조부의 유품이다./사진가 강민구

김 소장은 “행태(行態)가 형태(形態)가 되는 건축”을 철학으로 삼는다. 이번엔 책 읽을 때 선호하는 여러 자세, 편안한 가구 높이를 분석해 공간에 녹였다. 3층으로 된 비정형 내부엔 눕고 앉고 서서 독서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구석구석 펼쳐진다.

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 /김미리 기자

‘책’보다는 ‘공간’에 방점이 찍힌 느낌이다. 건축가가 말한 서점의 콘셉트는 ‘어른을 위한 술 마시는 만화방’. “만화광이자 애주가인 건축주가 찾아왔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뜨겁게 불타고 식어버린 동네에 마니아들이 조용히 와서 그래픽 노블을 즐기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서점이지만 딱딱하지 않은 곳, 그렇다고 술집처럼 너무 자유분방하지도 않은 곳. 서점도 술집도 아닌 제3의 유희 공간”이 목표였다.

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 /김미리 기자
경리단 서점 '그래픽'

여기 맞춰 운영 시간도 평일엔 오후 4시·주말엔 오후 1시에 문 열고 밤 11시에 닫는다. 입장료를 내면 비치된 음료(술은 유료)를 맘껏 먹을 수 있고, 책을 사면 1만원을 할인해 준다. 서점에서 만난 정다은(45)씨는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세련된 분위기에서 무료 음료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어 본전 뽑는 것 같다”면서도 “책이 다양하지 않은 건 아쉽다”고 했다.

이태원 경리단 서점 '그래픽'. /김미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