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은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본질을 사유합니다” 앙상한 팔로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진 청동 여인(최종태 ‘생각하는 여인’). 그녀의 뒤쪽 벽, 세 줄 문구가 보인다.
“푸른 하늘과 흰 항아리와/ 틀림없는 한 쌍이다/ 똑/ 닭이 알을 낳듯이 사람의 손에서 쏙 빠진 항아리다” 백자 달 항아리, 김환기의 추상화 옆엔 김환기의 글귀가 박혀 있다.
텍스트를 머금고 또 하나의 작품이 된 벽. 이 장면을 스마트폰에 담으려는 손이 여기저기 잠망경처럼 뻗어 있다.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이다.
‘텍스트의 힘’이 전시장을 수놓고 있다. 글은 이제 작품 설명을 위한 보조 역할에 머물지 않고, 주역을 자처한다. 지난달 22일 폐막한 서울시립미술관 권진규 전시는 “예술적 산보−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이라는 권진규의 시로 시작됐다.
인스타그램에선 작품 사진과 함께 사각 프레임에 맞춰 찍은 전시 문구를 세트로 올리는 게 유행이다. “문화는 좋고 나쁨으로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 문화란 단지 다를 뿐입니다.” 이건희 에세이에서 발췌한 이 문장은 방탄소년단 ‘RM’도 인스타그램에 올려 바이럴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전시 디자인의 관점에서도 글의 중요성이 커졌다. 발췌 내용과 ‘글꼴’이라는 형식 두 측면에서 공을 들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이현숙 디자인전문경력관은 “전시에서 스토리텔링이 중요해지면서 글이 지닌 힘도 커졌다”면서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은 수집가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는 콘셉트로 ‘글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게 문구를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글꼴은 정갈함과 따뜻함을 보여주기 위해 ‘정인자체’를 통일해 썼다. 큰 제목부터 캡션 설명까지 크기와 강약만 달리할 뿐 통일했다. 이 과정에 그래픽디자이너인 국민대 정진열 교수가 참여했다.
글씨 자체가 조형물이 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반가사유상 상설전시장인 ‘사유의 방’의 입구에 쓰인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문구는 황동 소재로 금속활자처럼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주 디자인전문경력관은 “문구가 직접적으로 의미 값을 전달해주기도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면서 글의 의미를 느끼는 과정을 통해 관람객들의 인지가 훨씬 입체적으로 작동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근현대 작품의 경우 작가들이 쓴 문장을 채집해 보여줌으로써 감성 좁히기를 해 동시대성을 보완하기도 한다”고 했다. 결국, 글[文]과 그림[畵]은 같은 뿌리를 공유하며 상보적 관계에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