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학교 교사들의 기숙사로 설계한 구기동 공동주택. 윗집 베란다가 아랫집의 차양이 되도록 디자인하고 층마다 있는 정원에서 우연한 마주침이 일어나도록 했다. /간삼건축

“1983년 6월부터 991건의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연면적으로 1280만평 정도 되더라고요. 경기도 오산시 면적과 비슷하니까 도시 하나를 만든 셈이죠.”

20일 서울 장충동 사옥에서 만난 간삼건축 김자호(78) 회장은 그동안 해온 작업을 이렇게 요약했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간삼건축은 서울 한국은행 본점, 포스코센터, 동숭아트센터 등을 설계한 국내 대표적 건축설계 기업이다. 안도 다다오(LG아트센터)나 렘 콜하스(갤러리아백화점 광교) 같은 세계적 건축가들과도 협업해왔다.

창립 파트너였던 이범재·이광만 건축가는 은퇴하고 김 회장이 고문 역할을 하고 있다. 건네받은 명함에 ‘대표사원’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이제는 대표이사직에서도 물러났으니 사원이죠 뭐. 우리나라는 ‘사장’ 같은 직함을 중시하지만 사실 나는 그냥 건축가예요.”

김 회장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을 ‘제안’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국가 경제와 함께 발전하고 그 시대의 기술과 철학을 반영합니다. 바꿔서 생각하면 건축가가 새로운 기술과 철학을 제안하고 건축물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킨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20일 서울 장충동 사옥에서 만난 간삼건축 김자호 회장. "새로운 기술과 생각을 건축물을 통해 사회에 제안하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했다. /간삼건축 제공

대표작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가 그런 예에 해당한다. 1995년 준공 당시 언론에 ‘환상의 빌딩’ ‘첨단건물’로 소개된 이 건축물은 국내 기술로 구현한 인텔리전트 빌딩(온·습도와 채광 관리 등 자동화 기능을 갖춘 빌딩)의 효시로 손꼽힌다. “박태준 회장은 포스코의 미래로 정보통신사업을 구상했어요. 새 회사를 만들고 그에 걸맞은 세계적 건축물을 짓기 위해 포스코 자회사인 세마건축, 일본 니켄세케이(日建設計)와 함께 설계했는데 포스코가 정보통신 사업권을 갖지 못하게 됐죠. 사업계획이 바뀌면서 이 건물도 서울 사옥으로 재설계했습니다. 그렇게 국내 팀만의 노력으로 이룬 결실이 지금의 포스코센터입니다.”

간삼은 사무용 건물과 연구시설, 데이터센터 등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각 층의 공동정원에서 입주자들이 자연스럽게 마주치도록 한 ‘구기동 공동주택’으로 2020년 한국건축가협회상 건축상과 건축문화대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주거용 건물 작업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김 회장은 “닭장 같은 집은 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이제 40년을 맞아 새로운 주거 문화를 제안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는 강원 고성군에 단독·공동주택 약 290가구 규모 마을을 조성하는 코빌리지(Co.Village)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아파트를 수평으로 펼쳐놓은 듯 이웃과 단절된 일부 타운하우스와 달리 마당 등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아파트 비율이 50%를 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좀 더 친환경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만들어서 제안해보려고 합니다.”

간삼은 그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코빌리지 구상을 제시하는 전시를 다음 달 4일까지 사옥 로비에서 열고 있다. 설계 과정에서 나온 도면, 스케치, 그래픽 등을 접시나 태피스트리(직물) 등으로 구현한 작품들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