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의 입구 앞에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전시장 출입문 옆 외벽에 놓인 최정화 작가의 네온사인 설치작품 ‘ㄱ의 순간’ 연작을 카메라에 담는 중이었다. 석기시대 목재 위에서 반짝이는 한글이 새로운 개봉 박두를 알리고 있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이 오늘 개막한다. 한글 관련 역대 최대 규모로 준비된 이번 미술 전시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 전시실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개막 전날 찾은 전시장은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었다. 예술의전당 중앙 통로 첫 층에 자리한 제7전시실은 가히 120평 규모 원시 동굴이라 할 만했다. 캄캄한 고대 동굴을 탐험하듯 어둠 속에서 미지의 문양을 발견하듯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강소의 획, 이우환이 부려놓은 바위(자연)와 철판(인위), 최병소가 펜으로 활자를 제거한 까만 종이가 문자 이전 태초의 의미를 배가한다.
여기에 최초의 언어, 소리가 메아리친다. 국악 작곡가 원일이 꾸민 암실에서는 태곳적 인간이 갈망하던 하늘, 거기서 반짝이는 북두칠성의 형태와 훈민정음의 조형적 유사성이 교차한다. 북두칠성을 노래하는 음향이 새어나와 전시장 전체로 흘러넘치는데, 이를테면 북두칠성과 고대 유물의 문양을 부적처럼 함께 골판지 위에 병치한 화가 김혜련의 그림 ‘예술과 암호–고조선’ 연작은 그 묘한 울렁임으로 음악과 함께 호응하게 된다. 전시장에서 만난 원일은 “차분히 마음을 내려놓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씨앗이 자라 줄기와 꽃으로 이어지듯 서예박물관에 이르러 한글이 본격 전개된다. 1층에 마련된 강익중 작가의 대형 한글 설치작 ‘트롯 아리랑’을 지나 2층에 도달하니, 벽면에 음파 형태로 나열한 TV 64대가 주역(周易) 64괘의 한글 창제 원리와 연결되는 백남준의 ‘W3’가 막판 조율 중이었다. 백남준의 모든 작품 설치·보수를 담당하는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전시를 준비하며 얼마 전 백남준 선생님 꿈을 꿨다”며 “‘나랑 당신이 함께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특히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맞은편에 걸린 채 원초적 조형 의식을 드러내는 천전리 암각화 탁본이 백남준의 TV 화면을 반사하며 1만년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용선 화가는 전시장 바닥에 ‘ㅏㅑㅓㅕ’ 등의 한글 모음 형태로 기왓장을 배치하는 중이었다. 언어적 건축성을 함의하는 작업이다. 그는 “매일 쓰는 일상의 한글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심오한지 전시를 준비하며 강렬히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2층 전시장 구석으로 갈수록 묘한 향(香)냄새가 감지됐다. 오인환 작가가 바닥에 자신의 전매특허 향 글씨를 남기고 있었는데, 이 향은 전시 내내 타오르며 바닥에 강렬한 문양을 남기게 된다.
곳곳에서 한글이 율동과 몸의 언어임을 깨닫게 된다. 무용가 김효진은 세종대왕이 작곡한 음악 ‘여민락’(與民樂)에 맞춰 움직이는 무용수의 발을 모니터 16대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 철학을 가장 전면에 드러낸다. ‘한글 전도사’ 방탄소년단과의 협업으로 일약 세계적 인지도를 얻은 미디어 작가 강이연은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동반자 ‘아미’를 작품에 끌어들였다. 이들을 상징하는 문양 형태로 제작된 스크린, 그 위에 훈민정음 획으로 변화하는 점·선·면의 추상이 방탄소년단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폭발한다. 배경음악에도 외국인 팬들이 부른 ‘한국어 떼창’이 섞였다. 강이연은 “‘아미’라면 곧장 알아챌 몇 가지 코드를 숨겨놨다”고 말했다.
3층에는 신문 활자를 인공 진주로 대체한 고산금 작가, 충무로 인쇄소에서 버려진 납 활자를 모아 단어와 문장으로 재배열한 노주환 작가의 작품도 모든 준비를 마치고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노랫말 등을 적은 나무판으로 방 전체를 채운 이진경 작가, 한글의 어제와 오늘을 증명하는 영상을 인터넷에서 채집한 박정혁 작가의 영상 작품도 완료됐다. 오늘, 그 모든 글자가 눈을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