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빛 엽서에 실려온 향기는 당신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임영웅·장민호 등 트롯맨 6인의 얼굴과 노래 영상이 가사와 함께 오방색 한글 타일로 제작된 강익중 작가의 ‘트롯 아리랑’을 12일 한 여성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 오는 18일 가수 영탁·이찬원이 이 작품을 찾을 예정이다. /고운호 기자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이 12일 개막했다. 한글 관련 역대 최대 규모로 준비된 이번 미술 전시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 전시실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개장과 거의 동시에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이 전시장을 찾았다. 화가로도 활동하는 성파 스님은 “이 전시 보려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채비했다”며 “고대와 현대, 시각과 청각을 망라하며 ‘ㄱ의 순간’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문화의 발상과 이후를 제시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일착으로 전시장을 찾은 이재온 황창배미술관장 역시 “보통 전시와 차원이 다른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①12일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오인환 작가의 향가루 설치작 ‘남자가 남자를 만나는 곳―서울’.

임영웅(보랏빛엽서)·영탁(막걸리 한잔)·이찬원(진또배기) 등 ‘미스터트롯’ 가수 6인의 노랫말과 6곡의 아리랑 가사로 오방색 한글 타일을 벽면에 12m 길이로 펼쳐낸 강익중 작가의 대작 ‘트롯 아리랑’은 중년 관람객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트로트가 작품에서 흘러나와 서예박물관 1층을 가득 메우며 발길을 붙잡는다. 친구 다섯 명과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한 60대 여성은 “작가의 기존 작풍에 트로트 음악이 더해지니 훨씬 신명 난다”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누군가 두고 간 장미꽃 다발이 작품 옆에 놓여 있었다.

②김혜련 화가의 ‘예술과 암호―고조선’ 연작이 실제 가야 토기와 한 공간에 놓여 있다.

전날까지 막바지 조율에 한창이던 2인조 미디어 작가 태싯그룹의 ‘Morse ㅋung ㅋung’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래적 언어를 제시하는 작품으로, 사각의 LED 모니터 3대에서 각각 모스 부호처럼 돌출하는 빨간색 점이 조금씩 한글 ‘쿵’으로 변화한다. 한글 획을 음표에 대입한 강한 박자의 전자음악이 쿵쿵쿵 전시장을 울리며 호응한다. 끊임없는 분해와 재창조 과정을 통해, 한글이 추상성과 조형성을 시청각으로 동시 전달하는 예술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관람객 조희주(25)씨는 “평소 한글을 크게 의식하고 살지 않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글을 재해석한 작품을 보니 놀랍다”고 말했다.

③태싯그룹의 ‘Morse ㅋung ㅋung’. 모스 부호처럼 돌출하는 빨간색 점이 한글 ‘쿵’으로 변화한다.

한글과 깊은 차원에서 연결돼 오래 골몰해야 하는 작품이 많아, 관람객 대부분 발걸음이 차분했다. 갖가지 조형 실험과 여러 유물의 세월을 관통해, 전시장 마지막 공간에 놓인 박정혁 작가의 영상 작품 ‘같다=다르다’에 이르러 전시는 하나로 종합된다. 지구의 탄생으로 시작되는 영상 위에서 흐르는 강물, 풀벌레 날갯짓 등 온갖 자연 풍경과 그 음향이 한글 자막으로 깜빡인다. 즈브즈브, 찌루리루리릵, 삐비이이잉비이비이…. 만물의 소리가 한글이 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영상은 조용히 보여준다. 감동에는 국경이 따로 없었다. 이날 전시장을 찾은 영국 코로넷극장 안다 윈터스 예술감독은 “거대한 과학성과 예술성의 여러 사례를 마주했다"며 “절대 놓쳐선 안 될 전시”라고 평했다.

④박상순 작가의 시화 ‘밤이, 밤이, 밤이’.
⑤김종원 서예가의 ‘새로 쓰는 임신서기석’. ⑥이수경 작가의 ‘번역된 도자기’(왼쪽)와 이슬기 작가의 누비이불 연작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⑦전광영 작가가 조선일보 창간 기념호·100주년 특별호, 훈민정음 해례본 복제본 등으로 제작한 ‘100년의 증언’ 옆 모습.
⑧오수환 화가 ‘대화―한글’ 앞을 지나는 관람객들.


[전시장이 거대한 포토존… 김성주 목소리로 작품 설명을]

‘가이드온’ 앱 통해 들을 수 있어… 김환기·서도호作 제외, 촬영가능

전천후 유명 방송인 김성주(48)씨가 ‘ㄱ의 순간’ 오디오 가이드로 참여한다. 제작 의도와 작품에 숨겨진 의미 등을 친숙한 목소리로 소개한다. 개인 스마트폰으로 애플리케이션 ‘가이드온’을 내려받아 손쉽게 오디오 가이드를 들을 수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현장 도슨트 및 기기가 제공되지 않는 만큼, 위생적으로 안전하고 깊이 있는 관람이 가능하다. 김환기·김종영·백남준 등 작고 작가와 서도호·최정화·오수환·안상수·강이연·유승호 등 현역 작가의 작품 및 유물 등 24점에 대한 상세 설명이 담겼다.

이번 전시장은 대작과 희귀작으로 가득한 거대한 포토존이다. 김환기·서도호 작가의 출품작을 제외한 모든 작품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다만 오인환 작가의 향 가루 설치 작품은 관람객에 의한 훼손 위험이 커, 접근 촬영 시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