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點)은 자체로 글자다. 씨앗처럼 보이는 그것은 점차 선과 면으로 자라나며 여러 의미로 넓어진다. 화면 위에 점 몇 개가 떠오른다. 한글 점자 ‘훈맹정음’이다. 점자로 쓴 ‘한글’이 이윽고 거대한 빛의 파장으로 폭발한다. “한글 작품을 구상하며 ‘구조성’에 집중했다. 점→선→면의 단계로 건축되는 한글의 체계가 오늘날 한글의 세계적 확장과도 연결된다.” 미디어 작가 강이연(38)씨가 말했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여한 강씨는 이번에 몰입형 미디어아트 신작 ‘문’(Gates)을 선보인다. 공간 전체를 채우는 5분 분량의 영상은 점에서 시작된 선이 면을 이루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고, 점점의 빛이 들어와 흔들리고 섞이고 파도치는 점층의 서사 구조를 지닌다. 강씨는 “한글이 읽히려고 존재하듯, 이번 작품 역시 그 의미가 잘 읽히고 해석될 수 있게 신경 썼다”고 말했다. 그 방편으로 ‘훈맹정음’을 비롯한 해석의 즐거움을 주는 여러 상징을 작품에 심어놨다. “관람객에게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종종 받는데 이번 작품의 상징을 정확히 맞춘 분이 벌써 꽤 된다”고 했다. 전시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 전시실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가장 큰 상징은 바로 방탄소년단과 이들을 전 지구적 한글 전도사로 밀어올린 다국적 집단 ‘아미’다. 영상이 맺히는 스크린부터 방탄소년단·아미의 로고 모양이다. 그것은 각도에 따라 ‘ㄱ’ 혹은 ‘ㄴ’처럼 보인다. “아미를 통해 어떻게 한글이 파급되는지 조사했다. 한글 전파 양상 분석 그래프를 보면, 방탄소년단이 인기를 얻는 2016년부터 수치가 급속도로 올라간다. 한글 가사를 알파벳으로 옮긴 ‘돌민정음’(아이돌+훈민정음)도 생겨났다. 새로운 문이 열린 것이다. 이 같은 풀뿌리식 확산은 훈민정음 창제 후 여성과 평민을 주축으로 발전해온 한글의 역사와 닮아있다.” 반투명 스크린 너머로 영상이 흐르고 뻗어나간다.
강씨의 작품 세계 역시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해왔다. “원래 그림을 그렸다. 쌓여가는 평면의 캔버스가 너무 싫었다. 크게 그리고 싶어도 제약이 컸다. 도망치고 싶었다.” 2007년 대학 졸업 후 미디어아트로 전향해, 2008년 조선일보 주최 ‘제1회 아시아프’에 영상 분야로 참여하기도 했다. 2013년 영국으로 넘어갔고,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미술관 실내를 프로젝션 매핑으로 채우는 등의 실험을 감행해왔다. 그리고 지난 1월 방탄소년단과의 협업 전시 ‘Connect, BTS’에 참여하며 극적 도약을 이뤄냈다. 당시 작품이 방탄소년단의 안무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아미가 야기한 연결성에 주목했다. 아미들이 공연장에서 흔드는 보랏빛 응원봉 ‘아미밤’도 작품에 녹아 있다. “공연장에서 반짝이는 ‘아미밤’은 마치 ‘인간 프로젝션 매핑’ 같았다”고 말했다.
몰입형 영상이기에 음향은 감동의 주요 요소다. 강씨가 객원 교수로 있는 영국왕립예술대학의 남아공 출신 제자와 함께 작업한 음악이다. “음향 협업은 처음이다. 이질적 요소를 최대한 섞고 싶었다. 그게 한글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영상 말미 유심히 귀를 기울이면 웬 ‘떼창’ 소리가 들릴 것이다. “외국인 아미들이 방탄소년단 노래 ‘둘! 셋!’을 따라부르는 소리”라며 “유럽·동남아시아 등지 공연장에서 따와 하나로 섞었다”고 했다. 그 목소리가 가장 현재의 한글을 발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