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ㄱ의순간' 이슬기 작가-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이슬기 작가가 통영 누비이불로 한국 속담을 표현한 작품 앞에 앉았다. 벽에 걸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 뜻처럼 무지몽매함을 드러내려 흑백만 사용했다. 실제 이불같이 바닥에 눕힌 왼쪽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에서는 위아래로 짙은 갈색 개와 황토색 개의 옆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연보라색 귀를 늘어뜨린 개 한 마리를 표현한 뒤 초록·빨강·파랑의 원색으로 여백을 채웠다. 규격은 모두 195x155㎝, 지금도 덮고 잔다는 처음 선물 받은 누비이불 크기와 같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이불을 덮고 인간은 반평생을 보낸다.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곁에 있다. 잠들고, 앓고, 사랑하고…. 중요한 것은 이불이 꿈꾸는 장소라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꿈과 현실의 경계선처럼 여겨진다. 가장 사적인 공간에 공동체 의식을 담아보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 그 이불을 덮는 사람의 꿈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가하는 작가 이슬기(48)씨는 전통 누비이불로 한국 속담을 표현하는 ‘이불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1992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생활하며 지인에게 얇은 통영 누비이불을 선물받았다. 색감도 질감도 너무 좋았다. 한국에 갈 때마다 선물용으로 찾아다녔는데 ‘요새는 안 나온다’고 하더라. 직접 제작을 결심했다.” 6년 전 본격 작업에 착수했다. 경남 통영의 누비장(匠)을 찾아 협업을 의뢰했다. 이씨가 상세 설명서를 보내면, 그곳에서 제작하는 방식이다. 이번 출품작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도 마찬가지. 언어와 공예를 직조(織造)라는 공통분모로 엮어내는 “한 땀 한 땀 공들인 1㎝ 두께의 조각”이다.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통영 누비이불로 제작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통영 누비이불 장인과 협업한 작품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알쏭달쏭한 기하 추상처럼 보이지만, 제목(속담)을 알고 나면 곧장 형상이 발견된다. “일곱 살짜리 조카도 다 맞혔다”고 한다. 신작 ‘서당개…’는 귀를 길게 늘어뜨린 개의 옆모습, ‘똥 묻은 개…’에서도 두 마리 개가 보일 것이다. 조형의 색감(오방색)과 더불어 바느질 방향 역시 작품 구성의 큰 요소다. “늘어진 귀는 수직으로,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어 수평으로 누볐다. ‘서당개…’ 구석에 있는 누런 삼각형은 살짝 기울어진 채 꽂힌 ‘책’을 사선으로 바느질했고, 여백은 3년이라는 시간성을 강조하려 세로로 누볐다.”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선정 ‘올해의 작가상' 최종 후보에 올라있다.

첫 작품 ‘이왕이면 다홍치마’ 이후 완성된 ‘이불 프로젝트’가 현재까지 50여점. “최근 완성한 ‘쥐 죽은듯 조용하다’는 코로나 시대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명품 업체 에르메스와 협업해 한정판 이불도 출시했다. “한국 속담은 시각적 은유가 풍부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어떤 현상을 해학적으로 드러내는 밈(Meme) 아닐까?” 이번 출품작 중 ‘ㄱ’을 전면에 내세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2015년 프랑스에서 먼저 선보였다. 무지몽매를 상징하기 위해 흑백으로 처리했다. “프랑스에도 ‘낫’은 있다. 그 농기구와 비슷한 한글의 첫 철자라고 설명하니 너무 신기해하더라. 한국 속담을 외국에 알리는 뿌듯함도 느낀다. 하지만 내가 드러내려는 것은 속담 자체가 아니다. ‘공유’라는 개념이다. 모두 알고 있지만, 각기 개별적인 형태로 기억되는 것.”

전통 야자수 바구니 장인을 찾아 떠난 멕시코 산골마을 익스카틀란에서 주민들과 함께 한 이슬기 작가(가운데 연두색 옷).

전통 공예와 언어의 현대적 결합은 이불 밖으로 뻗어나간다. “늘 장인들을 관찰하고 조형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토기 장인을 만나러 모로코, 바구니 장인을 찾아 부르키나파소 등을 누볐다. “야자수 바구니 공예를 위해 방문했던 멕시코 산골 마을 익스카틀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거기서 우연히 사멸 직전의 고유어 ‘익스카테코’를 알게 됐고, 그 언어의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흰 바구니 작품 ‘후아’(Hua)는 ‘하양’이라는 뜻의 현지어에서 차용한 것인데 한국말 ‘흰’이랑 비슷하게 느껴졌다.”

속담에서 더 나아가 연구 대상은 구두(口頭) 문화로 확장했고, 요새는 민요를 설치 작업에 접목하고 있다. 고려가요 ‘동동’(動動) 장단을 임의로 해석해 전통 소나무 문살로 표현하는 식이다. “전통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믿는다.”


[’ㄱ의 순간' 내년 2월까지]

현대미술과 진귀한 유물을 아우르는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이 내년 2월 28일까지 열립니다. 이번 전시는 거리 두기 등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철저히 준수합니다.

전시명 : ㄱ의 순간

기 간 : 11월 12일~2021년 2월 28일

장 소 :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시 간 : 오전 10시~오후 7시(입장 마감 오후 6시), 월요일 휴관

입장료 : 성인 1만2000원, 초·중·고교생 8000원, 유치원생 5000원

협 찬 : HYUNDAI

인스타그램 : art.hangeul

문 의 : (02)580-1300, (02)724-6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