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상자를 열었다. 도자기 파편이 가득했다. 100년 된 청자(靑瓷)부터 탄생 연대를 일별할 수 없는 토기의 잔해가 무용(無用)한 형태로 무더기였다. 깨진 도자기를 새로 조립해 전혀 다른 도자기로 빚어내는 작가 이수경(57)씨는 지난 1월, 중국 단둥에서 온 이 상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중국 고미술상으로부터 작품 제작용 도자기 파편을 제공받고 있다. 2~3년에 한 번씩 온다. 상자 속에서 웬 파편 하나가 딱 눈에 띄었다. 한글로 글씨가 적혀 있더라. 읽다가 소름이 끼쳤다. 하늘이 내린 계시처럼.”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참가하는 이씨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읽으며 전시를 준비하던 찰나, 이 글씨를 보는 순간 고민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의 전매특허 ‘번역된 도자기’ 연작은 201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본전시에 전시되고 최근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지만, 글씨(한글)가 들어간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자기 중앙에 ‘…중에 제일 가는 이 단지는 양인 천인 가리지 않네. 강 건너 산 넘어 이 고장 저 고장 집집마다 즐겨 쓰니 세상 천하 제일이구나’라고 적혀 있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훈민정음 창제 의미 그 자체 아닌가.” 전시는 내년 2월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과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린다.
그는 도자기 파편을 에폭시(접착제)로 이어붙여 새 형상을 창조한다. 초성·중성·종성이 하나로 건축돼 한글로 형상화되듯, 파편이 합쳐져 예상치 못한 시각적 결과로 태어난다. 예컨대 ‘안녕’이 부서져 ‘낭연’으로 재조합되듯 전혀 다른 모양과 의미를 획득하는 식으로, 도자기를 통해 숨겨진 언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금간 부위에 금(金)을 입힌다. 흉터를 장식해 적극 강조한다. 이씨는 이번에 100년 된 북한 해주(海州) 지역 도자기와 경기도 여주 백자 파편 등을 섞어 재조합했다. 130㎝ 높이로 부풀어 오른 ‘남북 합작 도자기’가 완성됐다. 한글 역시 원래 전국 팔도의 것이었다. “처음 한글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담은 외관이다.”
이씨는 1990년대부터 회화·설치·영상·퍼포먼스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고, 주로 개념미술 영역에 있었다. 반전은 21세기에 찾아왔다.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시조시인 김상옥의 ‘백자부’를 영어로 번역한 뒤 이탈리아 도공에게 ‘시조를 읽고 상상해 조선 백자를 만들어보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12점의 백자가 나왔는데,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친구와 경기도 이천의 가마터를 구경 갔다. “도예가가 마음에 안 드는 도자기를 퍽퍽 깨더라. 그것이 최적의 단어 하나를 골라내는 번역의 과정처럼 느껴졌다.” 오탈자처럼 버려진 사금파리를 그는 무작정 한 아름 얻어왔다. “책상 위에 놓고는 어느 날 만지작거리며 맞물려봤더니 잘 맞더라.” 번역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번역은 오역을 지향한다. “1990년대 말 미술계 동료들과 당시 인기 많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공부하며 읽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초판 번역이 이상했다. 해석이 잘 안 되니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읽었는데, 나중에 제대로 된 번역서를 읽고 실망했다. 오히려 언어의 오역과 오해가 창의성에 깊이 닿아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가 빚어낸 혼종(混種)의 도자기는 다중 언어처럼 보인다. “해외에 나가면 ‘너는 한국 작가니까’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백의(白衣)나 고졸미가 아닌, 우리에게는 너무나 뜨겁고 화려했고 예민한 예술 유전자가 있다. 그 다양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 최근엔 신라 금관에서 착안한 ‘왕관’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내가 탐착하는 모든 것이 내 유전자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