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을 찾은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서예가 서희환의 ‘찬란한 예술의 시대를’을 올려다보고 있다. 민 관장 뒤쪽은 박대성 화백의 ‘세종만세’. /고운호 기자

“디자인적 측면에서 한글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이겁니다. 서양인들이 한글 고딕체에서 힘이 느껴진다고 좋아해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층에 펼쳐진 ‘월인석보’ 앞에서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언제 봐도 멋진 글씨”라며 감탄했다. 한글 창제 직후인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부처의 일대기로, 불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책이다. “보세요, ㄱ, ㄴ, ㄷ···. 이 간결하게 꺾이는 아름다움 때문에 한글이 현대 디자인 요소로도 훌륭한 거죠. 다른 문자는 조형적으로 복잡해서 구현하기 어려운 반면, 한글은 뜻을 모르는 외국인들도 ‘딱딱 끊어지는 멋이 느껴진다’고 하거든요.”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전시된 '월인석보'(권 23·보물 제745-8호).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예술의전당

지난 11일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을 찾은 민 관장은 꼼꼼하게 전시실을 둘러봤다. “저희도 특별전 준비할 때마다 제목 정하는 게 큰 일인데, ‘ㄱ의 순간’이라는 제목이 참 좋다”며 “전시는 제목만 잘 지어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다. 그는 가야 토기와 함께 전시된 김혜련의 ‘예술과 암호-고조선’ 대형 연작, 문자 이전의 원초적 조형을 드러낸 이우환의 작품 앞에 한참 머물렀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인 천전리 암각화 탁본과 맞은편 벽면에 배치한 백남준의 64대 TV 화면, 그 사이에 놓인 가야 토기를 보면서는 “신석기시대부터 고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의 시간이 이 공간 안에 있다”며 “공감 가는 작품 배치”라고 끄덕였다.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을 찾은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백남준의 64대 TV화면과 가야 토기가 전시된 공간을 살펴보고 있다. 맞은편 벽면엔 선사시대 바위그림인 천전리 암각화 탁본이 걸려 있다. / 고운호 기자

이번 전시는 국가대표급 작가들이 한글을 미술로 재해석한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다. 47인의 회화·설치·서예 등 전 분야를 망라한 작품 100여점이 나왔다. 작고한 거장의 희귀작, ‘석보상절’ 원본 등 평소 접하기 힘든 한글 유물도 대거 선보인다. 민 관장은 “지구상에 있는 독립된 문자 중에서 누가 왜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문자가 한글”이라면서 “그동안 한글을 주제로 한 전시는 더러 있었지만, 한글의 탄생 이전과 이후를 조명하고 디자인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 조형 예술로서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부각한 특별전은 처음이라 뜻깊다”고 했다.

한글특별전 ‘ㄱ의 순간'에서 강이연의 미디어아트 작품 '문'(Gates)을 감상하는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 / 고운호 기자

그는 강이연의 미디어아트 작품 ‘문’(Gates)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한글 전도사가 된 가수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지지자 ‘아미’를 소재로 차용한 5분짜리 영상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고, 화면 위에 점 몇 개가 떠올랐다가 거대한 빛의 파장으로 폭발하는 이미지를 흥미롭게 지켜본 그는 “한글의 우수성이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건데 그런 ‘열린 가능성’을 예술과 접목해 한글 본래의 가치를 세련되게 표현한 수작”이라며 “우리 박물관 전시에도 이 작가를 초청해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