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이건희(1942~2020) 회장의 개인 미술 소장품에 대한 가격 감정(鑑定)을 지난달 국내 미술품 감정 단체 세 곳에 의뢰한 것으로 17일 확인됐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이건희 회장의 별세 이후 재산 규모 확정 및 상속 문제와 관련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미술계는 “감정 대상 미술품 숫자는 약 1만2000점“이라며 “감정가 총합은 조(兆) 단위일 것”이라고 했다.
삼성 측의 의뢰로 미술품 감정을 진행하고 있는 곳은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세 곳이다. 전부 민간 단체로, 미술품 진위 감정 및 시세에 대한 추정치를 제시한 뒤 수익을 얻는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지난달 감정 의뢰가 들어왔고 최종 감정 평가를 이달 말까지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국내외 미술에 조예가 깊은 초일류 컬렉터였다. 이 때문에 감정 의뢰 품목 역시 최고급인 것으로 알려졌다. 석물·고서·도자기·불화 등 한국 고미술품부터, 약 900점에 달하는 유명 서양 현대미술품까지 아우른다. 이를테면 러시아 출신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 회화,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 영국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인물화 등이다.
◇자코메티·베이컨 작품 1000억대… “소장품만 1만2000점”
삼성 측이 감정(鑑定)을 의뢰한 이건희 회장의 컬렉션 품목은 화려하다. 이 회장이 ‘국보 수집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정도로 한국 고미술에 큰 애정을 보였던 만큼 지정문화재도 다수 포함됐다고 한다. 다만 국내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이중섭·박수근 등의 그림은 이번 감정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 관계자는 “사전 논의 단계에서 처분 대상으로 고려한 미술품만 감정을 맡긴 것 같다”고 했다. 서양 미술품의 경우 로스코 ‘무제’(1962), 자코메티 ‘거대한 여인III’(1960), 베이컨 ‘방 안에 있는 인물’(1962) 등이다.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유하고 있는 작품과는 별도의 이건희 회장 개인 소장품들이다.
이 같은 감정 작업에 대해 미술계는 이건희 회장의 재산 상속과 관련된 사안으로 보고 있다. 삼성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 전체 재산 총액을 파악하기 위해 진행 중인 사안”이라며 “상속세와 관련해서는 어떤 방향도 정해진 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상속세는 사망일 6개월 이후 가산세가 부과되기에 유족은 4월까지 관련 논의를 매듭지을 것으로 예상된다.
감정 절차 이후 해당 미술품의 행방은 판매와 기증,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상존한다. 크리스티·소더비 등 해외 경매를 통해 ‘큰손’에게 판매한 수익으로 상속세를 충당할 수도 있고, 호암미술관·리움 등을 관할하는 삼성문화재단에 넘길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 공공기관에 기증할 가능성도 역시 존재한다. 고미술품의 경우 문화재보호법상 제작 50년 이상 된 경우 해외 반출이 사실상 막혀 있기에, 한국 바깥으로 나갈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러나 서양 미술품은 사정이 다르다. 이를테면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1947)는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약 1583억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이번에 삼성 측이 감정을 맡긴 ‘거대한 여인III’(1960)는 이와 작품 성격이 유사해 감정가 역시 1000억원대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경매시장에 출품돼 외국 수집가에게 낙찰되는 순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전시장에서 볼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삼성 측의 미술품 컬렉션을 도왔던 한 화랑 관계자는 “외국 미술 애호가들은 미술 관람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라 삼성미술관 리움에 가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로 진귀한 컬렉션의 보고(寶庫)”라며 “만약 이 미술품이 외국으로 나가면 문화 자산이 사라지는 국가적 손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현재 재산세 및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고, 이를 공공 자산화해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납을 통해 국가가 확보한 미술품은 신규 문화 공간을 통해 전시되거나, 국립미술관·박물관에 대여하는 등의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광재 국회의원이 이러한 내용을 담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지난해 11월 대표 발의했고, 국회입법조사처도 그해 10월 발표한 입법·정책보고서에서 ‘미술품 물납제’ 도입을 위해 정책과 법령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전문가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문체부 측은 “단순히 납세자 편의를 확대하는 차원이 아닌 예술적·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우수한 문화유산을 공공 자산화해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확대하는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삼성 측에도 관련 의견이 전달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