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고(故) 김창열 화백의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김 화백의 1000호짜리 미공개 물방울 그림을 장남 김시몽 고려대 교수가 가리키고 있다. 이곳은 이르면 올해 ‘김창열기념미술관’으로 재탄생해 관람객을 맞는다. /이태경 기자

“15년 동안 그리셨습니다. 워낙 커 여전히 미완(未完)입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 화백이 남긴 약 1000호 크기(3x5m) 초대형 미공개 물방울 회화가 곧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김 화백의 서울 평창동 자택이 종로구립 ‘김창열기념미술관’으로 조성돼 이르면 올해 말 개관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김창열미술관’이 있긴 하지만, 생전 삶의 공간이 미술관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지난 5일 별세한 김 화백은 이번 미술관 건립을 위해 소장하고 있던 180여점의 작품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간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도 포함됐다. 붓질에 착수하기 전 그림의 전체 구도를 가늠하기 위해 밑그림 위에 붙여두던 물방울 모양 종이 등이다. 장남 김시몽 고려대 교수는 “1980년대 집을 지을 당시 아버지가 설계에도 관여했던 뜻깊은 공간”이라며 “작업 흔적이 오롯이 남은 이곳에서 관람객들이 작가를 추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창열·최종태·박서보…미술관 잇따라

한국 미술계 대표 작가들을 기리는 미술관이 평창동 일대에 잇따라 들어선다. ‘김창열기념미술관’을 시작으로, 원로 조각가 최종태(89) 선생의 평창동 ‘최종태미술관’, 단색화 거장 박서보(90) 선생의 이름을 딴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도 구기동 비봉주차장 부지에 건립이 역시 정해졌다. 이 같은 움직임은 이른바 ‘자문밖 미술관 프로젝트’ 일환. 미술계와 종로구청이 힘을 합쳐 자하문 밖 평창동·구기동·부암동·홍지동 일대를 미술로 묶는 기획이다. 이를 위해 해당 작가들은 자신의 대표작을 100여점 이상 선뜻 기부했다. 전위예술 작가 김구림(85), 원로 추상화가 윤명로(85), 한국 판화의 선구자 이항성(1919~1997) 등 이 지역 대표 화가들의 집을 개조한 미술관 건립도 추진되고 있다.

◇ “미술로 동네 가치 끌어올리자”

지난해 5월부터 자문밖문화포럼 등 미술 관계자들이 모여 “동네의 문화적 가치를 끌어올려보자”고 뜻을 모은 결과다. 평창동만 해도 갤러리·미술관이 44곳. 부암동(14곳), 홍지동(7곳) 등을 합치면 명실상부 거대 미술촌이다. 이미 갖춰진 자원을 활용해 지역을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포럼 관계자는 “한국 근현대 화단의 주요 인사와 인연이 깊고 서울의 번잡함 대신 고요를 되찾아주는 동네”라며 “이미 자생적으로 모인 예술 자원을 바탕으로 추가 문화 시설 유치를 계획하는 상향식 기획”이라고 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알리는 차원에서 김창열·박서보·최종태 등 작가 24인이 참여하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기획전시도 22일부터 3월까지 열린다. “향후 서울 전역에 이 같은 프로젝트가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어린이 놀이터도 미술로 조성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놀이터’다. 대표작 ‘번역된 도자기’로 유명한 설치미술가 이수경(58)씨는 깨진 도자기를 새로 조립해 전혀 다른 도자기로 빚어내는 자신의 전매특허 작업 방식으로 평창동 어린이 놀이터 조성에 나선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의 콘셉트로 미끄럼틀이나 정글짐 등을 제작하는 것이다. 종로구민인 이씨는 본지 통화에서 “각기 다른 파편을 이어붙여 새로운 조화를 만드는 기존 작풍대로 여러 재료와 아이디어가 융합되는 놀이터를 구상하고 있다”며 “안전을 위해 도자기가 아닌 플라스틱 등의 재료로 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르면 10월쯤 평창동 아이들은 작품 속에서 뛰놀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