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방배동 자택 거실에서 배우 강석우가 화가 오치균의 1991년 작 ‘서울’(116.8x80.3㎝)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 그림은 이번에 처음 외부에 공개된다. “표면에 그려진 형상뿐 아니라 화가의 인생과 그가 던지는 메시지까지 그림이다.” /고운호 기자

누구나 자기만의 서울을 지닌다. 그것은 구상이면서 추상이다.

배우 강석우(64)씨가 이 그림 앞에서 내밀한 격동을 느낀 까닭도 추억과 관련이 있다. 장충동 신라호텔을 중심으로 남산 일대를 담은 풍경화가 번진듯 흐릿하지만 또렷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하교하고 남산 올라가 총싸움하고 버찌 따먹던 충무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그림을 보면 애국가 흘러나올 때 물이 치솟던 장충분수도 생각난다.” 그림은 비스듬한 조감의 구도로 그려졌다. “다섯 살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살던 동네다. 화가가 이 장면을 어디서 바라봤는지도 알 것 같다.”

1991년 강씨는 오치균(65) 화가가 그린 이 그림 ‘서울’을 작가의 작업실에서 처음 접했다. 지금껏 한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이다. “그해 화가의 전시를 처음 본 뒤 동료들과 함께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다. 부암동 꼭대기 허름한 단층집이었는데, 이젤에 이 그림이 놓여 있었다. 미완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이건 꼭 내가 사겠다’고 했다.” 강씨의 어릴 적 집이 있던 묵정동은 그림 너머에 있다. 그러나 “나는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치균은 붓 대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린다. 아크릴 물감이 치덕치덕 쌓여 완성되는 그림은 그의 지문으로 이뤄져 있다. 1991년은 오치균이 가난과 싸우느라 혹독했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서 귀국전(展)을 연 해다. “나는 당시의 그림이 가장 좋다. 그림에 활동 반경이 보인다. 가난한 작가가 오갈 데 없이 몇 곳의 장소를 계속 파고든 느낌. 가장 힘들 때 가장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 같다.” 오치균이 유명 화가가 된 이후에도 강씨는 그의 전시회를 빼놓지 않고 찾는다.

화가 오치균이 2003년 그린 봄 풍경. 강석우의 집 침실에 걸려있다. /고운호 기자

강씨는 미술 애호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1970년대 말 지인의 소개로 화랑을 처음 가봤다. 그림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그림이구나’ 했다. 배우가 되고 나서도 몇 년간은 그림 살 수입이 안 됐다. 가끔 차(茶)도 한잔 얻어 마시고, 작가들도 만나고.” 뜻밖의 인연도 생겼다. “1989년 무렵 사간동에 연필화가 원석연 선생 전시 구경 갔다가 우연히 선생을 만났다. 고향이 황해도라고 하시더라. 우리 아버지도 황해도 출신이라 했더니, 그 자리에서 내 초상화를 그려주셨다. 나중에 아내와 같이 찾아뵙기도 하고.” 원석연이 강씨 부부를 그린 초상화가 집 현관 앞에 걸려있다.

직접 그림도 그리고 수집 욕심도 있다 보니,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가 즉석에서 거래를 제안한 적도 있다. “30년 전쯤, 식사차 들른 역삼동 한식집에 고영훈 화가의 그림이 있더라. ‘나한테 팔라' 했더니 며칠 뒤 ‘팔겠다’고 연락이 왔다. 주인 마음 변할까 봐 그날 바로 그랜저 지붕에 방석 두 개 깔고 그림 올려서 끈으로 묶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에 대한 기준은 단순하다. “안방에 걸 수 있는가. 그림이 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 그의 침실에는 오치균의 봄 풍경 그림이 놓여있다.

6년째 아침마다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클래식 작곡가 이름 수만명 외는 사람보다, 노래 하나 듣고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더 음악 잘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가끔 사람들이 ‘그림 어떻게 보냐’고 묻는다. 뭘 어떻게 봐요? 눈으로 보면 되지.”


☞화가 오치균은 누구?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리는 화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루클린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도시 풍경을 묵직한 질감으로 드러내는 ‘뉴욕’ ‘사북’ 연작 및 시골의 정감을 풍기는 ‘감’ 연작으로 유명하다. 2011년 이중섭미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