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나 피카소 그림이 아니다. 실물(實物)도 없다. 그러나 값은 ‘억’ 소리가 난다.
캐나다 가수 그라임스(33)가 최근 자신의 디지털 그림·영상 10점을 온라인 경매에 부쳤다. 테슬라 창업주 일론 머스크의 여자친구로 유명하지만 유명 화가는 아니다. 비행하는 아기 천사 등 가상 이미지에 배경음악을 깔아둔 일련의 작품들은 20분 만에 65억원어치가 완판됐다.
미국 디지털아트 작가 비플(40)이 제작한 10초짜리 영상 ‘교차로’는 지난달 660만달러(약 74억원)에 판매됐다. 길에 쓰러진 트럼프 전(前) 대통령의 알몸 앞을 행인들이 지나치는 단순한 작품이다. 지난해 10월 한 수집가가 6만7000달러(약 7500만원)에 사서, 몇 달 만에 100배 오른 가격에 되팔았다.
새로운 미술품 거래 시대가 개막했다. 이른바 ‘NFT’ 열풍이다. ‘Non Fungible Tokens’(대체 불가 토큰)의 줄인 말로, 작품과 구매자의 정보를 블록체인에 기록해 미술품을 디지털 자산으로 바꾸는 암호화 기술을 뜻한다. 거래 기록이 자동 저장되고, 위·변조도 불가능하다. NFT 기반 시장은 지난해 10월 세계 최대 경매 회사 크리스티가 본격 가담하는 등 미국을 중심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가상 화폐 미술 시장 데이터 분석 회사 크립토아트에 따르면, 지금껏 거래된 NFT 미술품은 약 10만점, 2220억원어치에 달한다.
열기는 한국으로 옮겨왔다. 경매 회사 서울옥션블루는 11일 “신한은행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미술품 디지털 자산 시장에 진출한다”며 “새로운 컬렉터와 작가들을 발굴하겠다”고 했다. 미술품 판매 회사 피카프로젝트 역시 이날 “NFT 기술을 적용한 팝아트 화가 마리킴의 디지털 회화를 다음 주부터 판매한다”고 했다. 다만 이 같은 미술품은 당연히 만질 수도 벽에 걸어둘 수도 없다. 심지어 온라인에서 누구나 공짜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살까? 서울옥션 관계자는 “디지털 원주민인 2030 MZ세대를 타깃으로 삼았다”며 “미술품 감상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고 ‘인증’하거나 이슈의 중심에 서는 데서 만족을 얻는 새 향유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가상을 추켜세우려 실물을 파괴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지난 4일 블록체인 회사 인젝티브프로토콜은 영국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그림 ‘멍청이’(Morons)를 NFT로 변환해 경매에 내놓고,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통해 진짜 그림은 불태웠다. 유튜브 생중계에서 “가상과 실물이 병존할 경우 작품의 가치가 실물에 종속되지만 실물을 없애면 NFT 그림이 대체 불가의 진품이 된다”고 말했다. 이 그림은 지난 7일 가상 화폐 228.69이더(ETH)에 팔렸다. 약 4억3000만원이다. ‘멍청이’는 미술 경매장에 모인 구매자를 조롱·풍자하는 작품으로, 그림에는 “이런 쓰레기를 사는 멍청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온라인에 개방된 NFT 미술품의 이미지 사용 등 저작권 문제가 아직 모호한 데다, 고유 디지털값을 지닌다는 이유로 거액에 거래되는 상황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큰돈이 유입되면서 가격 거품을 보이고 있다”며 “열풍이 가라앉으면 손실 위험이 크고 사기꾼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