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 작업실에서 만난 곽훈 화가. 그림 속 고래와 사람이 보인다. “어릴 적 이중섭 선생이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전시회 했던 걸 직접 본 기억이 생생한데 수십년 지나 그의 이름을 딴 상을 받게 되다니 인생이 참 재밌다”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노인은 고래 꿈을 꾸고 있다.

올해 제33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화가 곽훈(80)씨는 “요새 고래 더미에 둘러싸여 산다”고 말했다. 4년 전부터 그는 원시적 고래 사냥의 순간을 그린 샤머니즘적 회화 연작(‘Halaayt·할라잇’)을 그리고 있다. 경기도 이천 작업실은 온통 거대한 고래 그림으로 가득하다. “이누이트의 원시 고래잡이를 소재로, 망망대해에서 사람과 고래가 목숨 걸고 대결한다.” 화면에서 고래가 솟구치고, 미약한 점·선으로 표현되는 인간이 그러나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고래 사냥’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간절히 고래를 염원하면 조상이 고래를 보내준다는 믿음을 그리는 것이다.” 대략 이 같은 기복(祈福)의 영적 의미를 지니는 연작 제목은 그가 미국 서적에서 찾아낸 것이다.

처음 고래 흔적을 발견한 곳은 미국이었다. 1985년쯤 휴가차 들른 알래스카 해변에 널린 고래뼈를 보게 됐다. “바다 동물의 정수가 육지에서 반짝이는 장면”에서 태초의 원시성을 감지했다. 홀린듯 뼈다귀를 몇 개 주워와 그림 앞에 일종의 제기(祭器)처럼 놓아두는 식으로 작품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0년 전쯤 방문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또 한번 고래의 흔적과 마주했다. “얼마나 간절하면 돌을 쪼아 새겼을까. 동물 대 동물로 만나는 고래, 수천 년 전의 인간이 일순 맞닥뜨리는 미지의 저쪽을 그려내고 싶었다.”

곽훈의 미국 작가 데뷔를 가능케 했던 '찻잔' 회화 연작(왼쪽)과 창호지를 실로 엮어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도록 대구미술관 로비에 설치한 명상적 분위기의 작품 '시'(詩).

그 역시 “안 돌아올 작정”으로 한국을 떠난 적이 있다.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서 입상하는 등 촉망받는 화가였으나, 친척 상당수가 좌익 운동에 연루된 탓에 지속적인 관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75년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클리블랜드 광고 회사에서 일러스트를 그렸다. 열망이 자꾸 자라났다. 5년 뒤 캘리포니아로 넘어가 아이를 안고 대학서 미술을 공부하며 재기(再起)했다. LA카운티미술관·뉴욕 찰스 콜스 갤러리 등 미국 뿐 아니라 중국·스페인·영국·호주 등에서도 전시를 열며 이름값을 높였다.

몸은 바다 건너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고향에 있었다. 미국서 처음 그린 그림도 ‘찻잔’ 연작이다. “고등학교 시절 대구 앞산에서 땅 파면 많이 나오던 넙데데한 가야 토기가 떠올라 그렸다”고 했다. 어릴 적 경험한 6·25전쟁 등의 참상 탓에 그의 그림은 한국적 한(恨)의 개념으로도 곧잘 해석되곤 한다. 이를테면 ‘X’자 선으로 가득한 그림 ‘주문(呪文)’ 연작은 과거 가마니에 싼 시체를 추상화한 것이다. ‘주문’ 연작을 처음 구매한 한국인은 화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여사였다. “1981년쯤 LA 집으로 놀러왔던 김 여사가 내 그림 네 점을 골랐다”며 “그분 주머니 사정을 알기에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싼값을 불렀다”고 말했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당시 처음 선보인 곽훈의 퍼포먼스 작품 '겁(劫)/소리: 마르코폴로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의 한 장면. 직접 구운 항아리를 나무에 걸고 하나로 이어 거대한 플룻처럼 형상화한 뒤, 비구니 15명을 그 옆에 일렬로 앉혀 연결해 자연의 공명을 은유했다. /피앤씨갤러리

참선의 기운을 자아내는 화풍으로 명성을 쌓았고, 1995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전 당시 화가 윤형근 등과 함께 첫 대표 작가로 선발됐다. 항아리가 악기(플루트)처럼 걸린 소나무 대를 세우고, 그 옆에 비구니 15명이 앉아 하늘과 땅의 공명(共鳴)을 은유하는 퍼포먼스는 단연 화제였다. “그때 선보인 작품이 인기가 좋아 해외 전시만 수십 차례 열었다. 자꾸 하니 재미가 없더라. 그래서 끊었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지 않나? 칼국숫집은 수십 년 같은 칼국수를 내와도 되지만 화가는 그래선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고래를 그린다. 고래를 잡으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매일 새벽 일어나 붓을 잡는다.


[이중섭미술상 심사평]

“한국인의 미적 감성 탐구”

곽훈은 노장(老將)이지만 끊임없이 조형 실험을 모색한다. 이것은 곽훈이 여전히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이유이며, 2019년 열린 홍콩 개인전이 그 사실을 입증한다. 1975년 그는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로 인해 그가 한국 현대미술사(史)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곽훈의 작품 세계는 늘 한국과 관계 맺고 있었다. 직접 경험한 6·25, 4·19, 5·16 등 현대사의 궤적을 추상적 조형 언어로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다완(茶碗), 주문(呪文), 겁(劫) 연작, 그리고 박주가리를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 등을 통해 내면 깊숙이 자리한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냈다. 한국 고유의 미적 감수성을 지속 탐구하면서 곽훈은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 과정 안에서 주목할 성과를 이뤄냈다. 올가을, 수상 기념전에서 만나게 될 그의 새로운 작품을 기다린다.

제33회 이중섭미술상 심사위원회(김이순·김을·고충환·이선영·김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