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世紀)의 기증이 구체적 윤곽을 드러냈다.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 소장품,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점이 국민 품으로 돌아간다. 삼성 측은 28일 사회 환원 계획을 발표하며 “국보 등 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된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 근대미술품 등 1만 1000여건, 2만 3000여점이 국립기관 등에 기증된다”고 밝혔다. 기부 목록 대부분은 고미술과 근대미술로, 자코메티·베이컨·로스코 등 서양 현대미술품 대부분은 삼성미술관 리움 측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됐다.
삼성 측이 이건희 회장의 상속 문제를 둘러싸고 개인 미술 소장품에 대한 가격 감정(鑑定)을 지난달 국내 미술품 감정 단체 세 곳에 의뢰했다는 본지 보도<1월 18일자 A1면> 이후,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건희 컬렉션’의 행방이 공식화된 것이다.
먼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2만1600여점의 명품이 들어간다.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30대 나이에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며 처음 구입한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비롯해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4건, 보물 46건) 60건이 포함됐다. 박물관 측은 “한국 고고미술사를 망라하는 A급 기증품이고, 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의 경사”라고 했다. 고려 불화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단원 김홍도의 그림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를 비롯해 서적, 도자기, 고지도, 공예, 불교 미술품 등 한국 고고미술사를 망라하는 수준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고흐·고갱·모네·샤갈·피카소 등 서양 근대 미술사(史)를 열어젖힌 사조별 대표작가, 한국 근현대회화작품 등 1600여점 기증된다. 그간 “피카소 그림 하나 없는 국립미술관”이라는 오명에 시달렸던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는 이번 기부를 통해 소장품의 질을 급격히 끌어올리게 된 것이다. 기증 목록에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 등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도 포함됐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구입한 소장품 중 가장 고가는 13억원에 구입한 김환기의 ‘새벽 #3’(1965)였지만, 이번에 김환기의 대표작 전면점화 등을 얻게 됨으로써 이 역시 도약하게 됐다.
이번 기부에서 특기할만한 지점은 지방까지 알뜰히 챙겼다는 점이다. 전남도립미술관에는 전남 일대에서 활동한 동양화가 허백련, 대구미술관에는 대구 대표 화가 이인성, 제주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 강원도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작품을 기부하는 식으로 각 지역별 특성까지 감안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기증의 뜻을 기려 조만간 ‘이건희 특별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다만 급격히 수준이 올라간 소장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미술계의 막중한 책무가 남아있다. 초일류 컬렉션을 어부지리로 얻긴 했으나, 이 작품들에 대한 향후 관리 계획과 보존·수복에 대한 전망도 함께 내놔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