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世紀)의 컬렉션.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점이 국민 품으로 온다. 삼성 측은 28일 이 회장 유산의 사회 환원 계획을 발표하며 “국보·보물 60건이 포함된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및 국내 유명 근대미술품 등 이 회장의 수집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키로 했다”고 밝혔다. 기부 목록 대부분은 고미술품과 근대미술품이며, 자코메티·베이컨·로스코 등 서양 현대미술품 대부분은 공익 재단인 삼성문화재단(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됐다.
◇자식 같은 ‘1호 컬렉션’까지 내놨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명품 2만1600여점이 들어간다.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30대에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며 처음 구입한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비롯,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4건, 보물 46건) 60건이 포함됐다. 이건희 회장이 소유했던 국보 30점, 보물 82점의 절반 이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청자·분청사기·백자 등 도자기, 서화, 전적, 불교미술, 금속공예, 석조물까지 한국 고고미술사를 망라하는 A급 명품”이라며 “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의 경사”라고 했다. ‘이건희 컬렉션’ 감정평가 기관에서는 ‘인왕제색도’ 한 점만 최소 500억원 이상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고려 후기 불교 경전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국보 235호), 삼국시대 불상인 ‘금동보살삼존입상’(국보 134호), 고려 불화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 ‘추성부도’(보물 1393호) 등이 기증 목록에 올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총 43만여점. 이 중 5만여 점이 기증품인데 이번 2만점 기증은 기증 문화재의 약 43%에 달한다. 고려 불화, 분청사기, 조선 시대 목가구 등 박물관의 ‘약한 고리’를 단번에 메울 수 있게된 것이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작품 중에서도 ‘미래의 국보’가 다수 포함됐다”며 “A급 명품들을 적극적으로 국보·보물로 신청해 고인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피카소 없는 국립 미술관” 오명 벗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고갱·모네·르누아르·피사로·달리·샤갈·미로·피카소 등 서양 근대 미술사(史)를 열어젖힌 사조별 대표 화가 8인, 한국 근현대 대표 거장의 그림 등 1400여점을 기증한다. 특히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을 확보해 그간 “피카소 작품 하나 없는 국립 미술관”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소장품의 질을 급격히 끌어올리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증품 목록에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 등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도 460여점 포함됐다. 지금껏 미술관 소장품 중 최고가는 13억원에 구입한 김환기 ‘새벽 #3’(1965)였지만, 이번에 김환기 그림 중 가장 큰 ‘여인들과 항아리’ 및 전면점화 ‘산울림’ 등을 얻게 돼 이 역시 도약했다. 각 100억원을 호가할 것으로 미술계는 내다보고 있다.
지방 공립 미술관까지 알뜰히 챙겼다. 전남도립미술관에는 허백련,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 광주시립미술관에는 오지호, 제주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 강원도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내는 식으로 각 지역 특성과 대표 작가를 세심히 선별한 것이다. 다만 급격히 수준이 올라간 소장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미술계의 막중한 책무가 남아있다. 초일류 컬렉션을 어부지리로 얻은 각 미술관이 소장품에 대한 향후 전시·관리 계획과 보존·수복에 대한 전망도 함께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건희 컬렉션' 6월부터 일반에 공개
국립중앙박물관은 6월 중 대표 기증품을 선별한 ‘고(故)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을 시작으로 내년 10월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명품전’을 잇따라 개최할 예정이다. 이후 전국 13개 지방 소속 박물관에도 순회전이 예정돼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에서 ‘이건희 명품전’을 8월에 열고, 9월 과천관, 내년 청주관 특별전으로 이어간다. 해외 전시도 논의되고 있다. 두 기관은 이번 기증품을 디지털 자료화해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할 계획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새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세 기관이 연대해 공동 해외 마케팅을 펼치는 방식도 가능하다”며 “해외 관광객이 와서 꼭 찾아가고 싶은 전시장이 국내에도 생긴다는 데 이번 기부의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