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홍라희 부부가 30대에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면서 처음 구입한 작품인 겸재 정선 '인왕제색도'. 서예가 손재형 선생의 컬렉션을 한꺼번에 구입했는데 그 안에 '인왕제색도'가 포함돼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세기(世紀)의 컬렉션.

이건희(1942~2020)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2만3000여점이 국민 품으로 온다. 삼성 측은 28일 이 회장 유산의 사회 환원 계획을 발표하며 “국보·보물 60건이 포함된 고미술품과 세계적 서양화 및 국내 유명 근대미술품 등 이 회장의 수집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키로 했다”고 밝혔다. 기부 목록 대부분은 고미술품과 근대미술품이며, 자코메티·베이컨·로스코 등 서양 현대미술품 대부분은 공익 재단인 삼성문화재단(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됐다.

금동보살삼존입상(국보 134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 1805년 61세의 단원이 중국 송나라 구양수가 지은 '추성부'를 그림으로 그렸다. 구양수가 전하고자 했던 노년의 비애이자 죽음을 앞둔 단원의 심리가 드러난다.
고려 후기 불교 경전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국보 235호)의 부분. 검푸른 종이에 금색으로 정성스럽게 옮겨 쓴 것으로 병풍처럼 펼칠 수 있는 형태다.
조선 '분청사기 음각 수조문 편병'(보물 1069호). 납작한 몸통 양쪽에 꽃무늬를 그려 넣었다.
'월인석보' 권11(보물 935호). 한글 창제 직후인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부처의 일대기로, 불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책이다.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국보 255호). 청동기 시대 후반 제사장들이 주술적 의미로 사용했던 것.
고려 '청자 상감 모란문 발우 및 접시'(보물 1039호).

◇자식 같은 ‘1호 컬렉션’까지 내놨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명품 2만1600여점이 들어간다. 역대 최대 규모다. 특히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30대에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며 처음 구입한 ‘인왕제색도’(국보 216호)를 비롯, 국가지정문화재(국보 14건, 보물 46건) 60건이 포함됐다. 이건희 회장이 소유했던 국보 30점, 보물 82점의 절반 이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청자·분청사기·백자 등 도자기, 서화, 전적, 불교미술, 금속공예, 석조물까지 한국 고고미술사를 망라하는 A급 명품”이라며 “박물관 개관 이래 최대의 경사”라고 했다. ‘이건희 컬렉션’ 감정평가 기관에서는 ‘인왕제색도’ 한 점만 최소 500억원 이상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고려 후기 불교 경전인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국보 235호), 삼국시대 불상인 ‘금동보살삼존입상’(국보 134호), 고려 불화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2015호), 단원 김홍도의 마지막 그림 ‘추성부도’(보물 1393호) 등이 기증 목록에 올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총 43만여점. 이 중 5만여 점이 기증품인데 이번 2만점 기증은 기증 문화재의 약 43%에 달한다. 고려 불화, 분청사기, 조선 시대 목가구 등 박물관의 ‘약한 고리’를 단번에 메울 수 있게된 것이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아직 국보·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작품 중에서도 ‘미래의 국보’가 다수 포함됐다”며 “A급 명품들을 적극적으로 국보·보물로 신청해 고인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피카소 없는 국립 미술관” 오명 벗다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고갱·모네·르누아르·피사로·달리·샤갈·미로·피카소 등 서양 근대 미술사(史)를 열어젖힌 사조별 대표 화가 8인, 한국 근현대 대표 거장의 그림 등 1400여점을 기증한다. 특히 피카소의 도자기 112점을 확보해 그간 “피카소 작품 하나 없는 국립 미술관”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소장품의 질을 급격히 끌어올리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증품 목록에는 김환기·이중섭·박수근·장욱진 등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도 460여점 포함됐다. 지금껏 미술관 소장품 중 최고가는 13억원에 구입한 김환기 ‘새벽 #3’(1965)였지만, 이번에 김환기 그림 중 가장 큰 ‘여인들과 항아리’ 및 전면점화 ‘산울림’ 등을 얻게 돼 이 역시 도약했다. 각 100억원을 호가할 것으로 미술계는 내다보고 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가 신화 속 존재인 켄타우로스의 출산 장면을 담아낸 '켄타우로스 가족'(1940). 정교한 테크닉과 안정적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달리 스스로 고전주의 양식으로의 회귀를 드러낸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상주의 화풍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를 상징하는 '수련이 있는 연못'(1919 ~1920).
인상주의 대표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1890년대)은 즐겨 그리던 독서하는 여인을 모델로, 특유의 부드러운 붓자국과 화사한 색감을 통해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화가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색채의 마법사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의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1975). 샤갈은 자주 연인과 꽃을 함께 묘사하는 데 몽환과 낭만의 화풍을 배가한다.
기호와 상징의 회화를 추구했던 스페인 거장 호안 미로 '구성'(1953).

지방 공립 미술관까지 알뜰히 챙겼다. 전남도립미술관에는 허백련,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 광주시립미술관에는 오지호, 제주 이중섭미술관에는 이중섭, 강원도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내는 식으로 각 지역 특성과 대표 작가를 세심히 선별한 것이다. 다만 급격히 수준이 올라간 소장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미술계의 막중한 책무가 남아있다. 초일류 컬렉션을 어부지리로 얻은 각 미술관이 소장품에 대한 향후 전시·관리 계획과 보존·수복에 대한 전망도 함께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 화가 이중섭을 대표하는 '황소'(1950년대).
전남 진도 출신 동양화가 의재 허백련의 '산수화첩'은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아이를 등에 업고 절구질하는 여인을 확대해 그린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은 한국적 정취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김환기의 전면점화 '산울림19-II-73#307'(1973).
소박함과 단순함의 미학을 추구했던 장욱진이 6·25전쟁 도중 그린 '나룻배'(1951).

◇'이건희 컬렉션' 6월부터 일반에 공개

국립중앙박물관은 6월 중 대표 기증품을 선별한 ‘고(故)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을 시작으로 내년 10월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명품전’을 잇따라 개최할 예정이다. 이후 전국 13개 지방 소속 박물관에도 순회전이 예정돼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에서 ‘이건희 명품전’을 8월에 열고, 9월 과천관, 내년 청주관 특별전으로 이어간다. 해외 전시도 논의되고 있다. 두 기관은 이번 기증품을 디지털 자료화해 홈페이지에 모두 공개할 계획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새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문화체육관광부 측은 “삼성미술관 리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세 기관이 연대해 공동 해외 마케팅을 펼치는 방식도 가능하다”며 “해외 관광객이 와서 꼭 찾아가고 싶은 전시장이 국내에도 생긴다는 데 이번 기부의 큰 의미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