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집 안을 장식하기 위한 게 아니다.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 도구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말했고, 이 철학의 직접적인 증거가 한국에 도착했다. 6·25전쟁을 소재로 1951년 완성한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 70년 만에 처음 국내에서 전시된다. 입체파(派) 효시 피카소가 제목에 한국을 적시한 유일한 그림이자, 이념 대립의 와중에 끊임없이 구설에 휘말려온 작품이다. 1960년대 피카소를 찬양하면 반공법이 적용됐고, 2011년까지도 고교 역사 교과서에 그림이 실리자 갑론을박이 거셌다. 몇 차례 반입 시도가 있었으나 예산 부족 등으로 좌절된 이 작품이 서울 예술의전당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서 8월 29일까지 공개된다. 그림에 얽힌 오랜 논란을 정리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공산당도 미국도 싫어한 그림, 왜?
‘한국에서의 학살’은 피카소의 대표적 반전(反戰) 회화로 꼽힌다. 다만 고국 스페인 내전(‘게르니카’)이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납골당’) 등 유럽을 다룬 전작과 달리, 관련이 먼 극동의 전란을 다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 그림은 6·25전쟁을 선동에 이용하려던 프랑스 공산당의 요구로 공산당원이던 피카소가 제작하게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프랑스 국립 피카소미술관과 협력해 전시를 성사시킨 전시기획자 서순주(58)씨는 “공산당이 압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며 “피카소는 전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어려운 상태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기 난감한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림은 크게 우측 무장 군인들이 좌측 여인·아이들에게 총을 겨누는 형상이지만, 미군이라는 식별은 전혀 없다. 공산당이 크게 실망한 이유다. 반면 이런 모호한 표현에도 미국은 격분했다. 당시 뉴욕현대미술관장 알프레드 바는 “피카소가 변명해도 분명한 반미(反美) 선전 작품”이라 일갈했다.
◇“시사성 크지만 예술성 높지 않아”
이 그림은 피카소가 존경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대표작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그대로 따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나폴레옹 군대(우)의 스페인 양민(좌) 처형 장면이 담긴 명작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서순주씨는 “피카소 특유의 입체적 개성이 그림 상단에만 드러나는 등 독창성이나 완결성 면에서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공산 진영이 “미군이 황해도 신천에서 민간인 3만여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신천군 사건’을 다룬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북한이 사건을 공세적으로 세계에 알린 것은 그림 완성 이듬해부터라 설득력이 부족하고, 학계에서도 이 사건이 미군 개입이 아닌 지역 내 좌·우익 투쟁의 결과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피카소 평전을 냈던 소설가 김원일(79)은 “시사성은 있으나 예술성을 높이 사기는 힘든 작품”이라 말했고, 최고령 현역 화가로 불리는 김병기(105)는 “전쟁을 너무 피상적으로 바라봤다”며 피카소를 지탄하는 글 ‘피카소와의 결별’을 써 1951년 부산서 낭독한 바 있다.
◇“피카소가 묘사한 건 전쟁 자체”
피카소미술관 요안 포플라르 큐레이터는 “피카소가 표현하려 한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였다”고 했다. 실제 피카소는 “전쟁을 그릴 때 오로지 잔혹성만을 생각한다”며 “미국이나 다른 나라 군모와 군복 같은 것은 생각해본 적 없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림은 그래서 목적과 입맛에 따라 활용돼왔다. 1956년 이 그림은 복제품으로 제작,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전시돼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출품작 110여점 중 가장 뜨거운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가장 비싼 작품은 따로 있다. 나무 위에 종이·못 등을 붙이는 아상블라주(Assemblage) 기법을 통해 1913년 창조한 ‘기타와 배스병’으로, 보험가 1000억원에 달한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현대 조각사에 한 획을 그을 걸작”으로 평한 작품이다. 대형 회화·도자기·조각 등 볼거리가 많아 전시는 인산인해였다. 지난 1일, 개막 첫날 관람객만 3000명에 육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