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추상 거장 서세옥 화백은 사람을 줄곧 그려왔다. “가장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 기증한 100여점의 작품 목록에도 ‘사람’ 연작이 포함됐다. ‘춤추는 사람들’(1994)은 몇 개의 검은 선으로 단순화된 인파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듯한 작품이다. 여러 사람이 그림을 통해 이뤄내는 화합과 감동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이번 기증은 특히 지방 미술관에 기증 바람을 일으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지방의 경우 서울 국립기관에 비해 예산이 열악해 지역 미술사(史) 연구 등 기증의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조각가 최만린 선생의 경우 대구와 연고가 없다. 고인의 국립현대미술관장 재직 시절 학예실에서 일한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유족 측이 지역 공공미술관의 역량을 신뢰해줬다”고 말했다. 대구미술관에는 최근 변종하 화가의 ‘수련’ 연작을 기증한 남성희 대구보건대 총장, 서진달 화가의 회화 작품을 기증한 인척 최철명씨 등 개인 소장가의 기증 사례도 줄을 이었다. 미술관 측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비롯해 작고 작가·유족·소장가 등 다양한 소장처에서 기증 의사를 밝혀 나눔의 가치를 높였다”고 했다. 미술관 측은 시기별 작품 연구 뒤 전시로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해 별세한 서양화가 김영덕의 유족 측도 부산시립미술관에 그림 9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현재 절차가 진행 중이다. 6·25전쟁의 비극을 헐벗은 아이들로 형상화한 그림 ‘전장의 아이들’(1955)로 유명한 화가다. 전쟁과 분단의 암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을 주로 남겼는데, 이번 기증 목록에도 정물화 ‘건어’(乾魚) 등 당대 분위기를 일별할 수 있는 작품이 담겼다. 유홍준 전(前) 문화재청장은 최근 전남도립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서예가 손재형의 글씨, 시인 김지하의 난초 그림 등을 기증했다. 미술관 측은 보답으로 감사패를 전달했다.
기증이 선의(善意)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나, 기증자에 대한 예우는 소박하다. 기증품을 모아 특별 전시를 개최하거나, 기증자나 유족의 이름을 미술관 벽면에 새기거나, 감사패를 전달하는 정도다. 기증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최근 상속 문제를 해결하고 작품의 원활한 보존·전시를 위해 미술관 기부를 고려하는 작가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작품 선별뿐 아니라 기증에 대한 보상의 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수작(秀作)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할 수 있도록 하는 ‘미술품 물납제’ 논의도 재점화되고 있다.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은 “작가 측의 기증도 물론 소중하지만 기업이나 주요 컬렉터의 기증이 활성화돼야 미술관이 풍요로워진다”며 “물납제가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