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김환기(1913~1974)가 죽고, 아내는 남편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무심히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내는 캔버스 뒷면에 붓으로 이렇게 적었다. “花岸 내 마음속에 살아나다오.” 花岸(화안)은 아내가 붙여준 김환기의 또 다른 이름이자, 아내에게만 허락된 애칭이었다.
화가이자 문필가였고 김환기의 예술 세계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향안(1916~2004) 여사를 조명하는 전시 ‘김향안, 파리의 추억’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 달관에서 12월까지 열린다. 본명 변동림, 시인 이상의 아내였고, 이후 애 셋 딸린 가난한 김환기와 재혼하며 남편의 호(號) 향안(鄕岸)을 제 이름으로 삼은 신여성의 사랑법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름과 함께 남편을 자기 자신으로서 받아들인 아내는 그를 더 큰 세상으로 인도한다. 프랑스 파리였다.
“도대체 내 예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얼근히 취한 남편이 말하자 아내는 대답했다. “나가봐.” “어떻게?” “내가 먼저 나가볼게.” 아내는 다음 날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갔고, 불어를 익혀 1955년 김환기보다 1년 먼저 홀로 현지에 건너가 작업실과 생활 여건을 마련했으며, 대학에서 회화와 미술비평까지 공부했다. 그것을 가능케 한 뜨거움, 당시를 증언하는 육필 원고 및 사진 등이 전시장에 놓여 있다. 수필에서 밝히고 있듯, 김향안에게 사랑은 “곧 지성(知性)”이었다. 믿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지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낭만의 공간 파리를 배경으로 김향안의 몽환적인 유화 10여 점이 소개된다. 초기작 ‘파리의 풍경’(1956)부터 ‘양귀비 들판’(1986) 등 이국의 온화한 기후를 드러내는 그림이 눈을 연하게 한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다소 절름발이 격이 되지 않을까. 부부란 서로의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인 줄로 안다.” 본관에서는 환기미술관이 지난해 구입해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김환기의 드로잉 스케치북을 8월까지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 ‘향안의 초상’(1957)이 등장한다. 희생이라 부를 수 있을 아내의 사랑 앞에 남편이 건넨 작은 선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