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숴(吳昌碩), 런이(任頤), 자오즈첸(趙之謙), 치바이스(齊白石)….
한국화 거장 서세옥(1929~2020)의 유족은 고인의 뜻에 따라 평생 모은 미술품을 지난달 성북구립미술관에 기증했고, 최근 이 기증품을 감별하던 미술 관계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중국 근대 서화(書畫) 대가들의 귀한 작품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 말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해상파’(海上派) 작품이 압권이었다. 기증 미술품 중 고인의 창작물을 제외한 순수 수집품은 992점이었는데, 이 중 해상파만 런쉰(任薰), 왕전(王震), 양보룬(楊伯潤) 등 150점에 달했다. 미술관 측은 “‘서세옥 컬렉션'은 해상파에서 조선 후기 화가 최북, 추사 김정희, 영운 김용진의 작품으로 이어진다”며 “중국과 한국 수묵의 상관 관계 연구 및 귀한 관람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아편전쟁 이후 통상 항구로 개방돼 각지의 화가가 몰린 상하이에서 해상파는 전통의 기초 위에 실험을 가미해 활달한 개성을 창조했다. 해상파 대표 화가 우창숴 등의 신(新)문인화에 심취했던 서세옥 역시 한국 근대 문인화의 새 모색을 시도했기에, 이번 컬렉션이 동양 문인화 전통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도 주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서세옥 컬렉션’에 포함된 우창숴의 작품 실물을 일별한 서예가 권창륜은 “중국 도록에도 없는 희귀작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노인과 동자의 수묵화(1917년작)의 경우 글씨는 우창숴, 인물은 우창숴 제자 왕전이 그린 합작화다. “근본이 우둔한 나는 깨달음을 얻기 참으로 어렵구나” “고행하는 출가자 그리다”라는 문장이 겸허한 내면의 도야(陶冶)를 권유한다.
자오즈첸의 모란 그림도 일품이다. 꽃의 흰색은 안료 가루를 뿌리는 당분법, 이파리는 윤곽선 없이 몰골법을 써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을 그려냈다. 꽃은 확대하고 줄기와 이파리를 화면 밖으로 잘라버리는 화풍에서 구성상 긴장감을 조성하는 해상파의 근대적 면모가 드러난다. “운대(芸臺) 이형께 드립니다”라는 글씨도 쓰여있다. 흔히 운대는 청나라 경학자 완원(阮元·1764~1849)의 호를 떠올리게 한다. 추사 김정희가 그와 교유했고, 이후 존경의 의미로 자신의 호 완당(阮堂)을 지었기에 우리나라와도 친숙한 이름이다. 그러나 이동국 서예박물관 큐레이터는 “운대를 ‘이형’(二兄)이라 칭한 것으로 미뤄 화가의 집안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우창숴의 후학으로 현재 중국 화단의 상징과도 같은 치바이스의 서화가 눈길을 끈다. 치바이스의 수묵화는 2017년 중국 미술품 경매 낙찰 최고가(약 1530억원)를 새로 쓴 바 있다. 이번 ‘서세옥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은 파랑·주황·빨강의 물감을 꽃잎에 입히고, 줄기마저 꽃잎 색과 통일했다. 고향을 떠나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기며 홍화묵엽(紅花墨葉) 기법으로 화풍이 일변한 시기의 작품이다. “하늘과 노을 서로 비추며 좋아하듯, 늘그막의 얼굴색이 붉은 꽃과 같구나. 백석산옹(白石山翁) 그리고 쓰다.” 국내에도 드물게 개인 소장된 작품이 있긴 하나 대중에 공개되는 경우가 드물고, 워낙 위작(僞作) 시비가 많아 출처가 확실한 치바이스의 그림을 상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미술관은 관련 연구 작업을 진행해, 10월부터 순차적으로 작품을 전시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