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교회당처럼 설계된 전시장 내부에서 물결치는 미디어아트 영상이 실제 물 위에 반사되며 비현실적 풍경을 야기한다. /고운호 기자

“미술과 음악은 하나다. 음과 양처럼.”

영국 유명 가수 제임스 라벨(47)은 말했고, 이것이 유례없는 첨단 몰입형 체험 전시로 구현됐다.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2019년 처음 선보여 폭발적 반응을 얻은 ‘비욘 더 로드’(Beyond The Road)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상륙했다. 몽환적 힙합·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라벨의 대표 앨범 ‘The Road’ 삽입곡을 재구성한 뒤, 영상·향기·조명 등 오감(五感)의 장르로 전시 공간에 풀어낸 것이다. ‘The Road’라는 음악의 초(超)음악화를 통해 관람객은 ‘Beyond The Road’로 향하게 된다. 전시는 23일부터 11월 28일까지 여의도 더현대 서울 6층 전시장 ALT1에서 열린다.

◇시각

조명 효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시장 내 교회당 풍경. 뒤편에 비치된 기도용 책상과 악보가 성스럽게 느껴진다. /미쓰잭슨

33개의 공간으로 나뉜 전시장은 거대한 뮤직비디오 세트장을 연상시킨다. 사실상 곳곳이 포토존이다. 99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148개의 특수 조명이 시시각각 분위기를 전환한다. 댄 플래빈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색색의 형광등이 공간을 분 단위로 바꾸며 “음악과 조명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백미는 이른바 ‘빛의 교회당’이다. 실내에 교회처럼 작은 성소(聖所)를 마련한 뒤, 미디어아트 작가 더그 포스터의 물결 영상을 벽면에 프로젝션으로 쏘는 것이다. 얇게 고인 실제 물, 그 위에 일렁이는 빛의 물결. 이 풍경의 뒤편에 기도용 책상과 악보가 놓여있다. 관람객은 그 앞에 잠시 꿇어 앉아 음악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양상을 묵상하게 된다.

◇청각

세계적 영화감독 대니 보일이 자신이 감독한 미국 드라마 '트러스트'를 직접 재편집해 출품했다. 빈티지 TV에서 영상이 흘러나온다. /미쓰잭슨

99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공간의 서정을 더한다. 세계적 거장도 관여했다. 2018년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로마’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이번 전시를 위해 5분 분량의 영상을 직접 재편집해 출품한 것이다. 라벨은 ‘로마’에 영감을 받아 노래 ‘On My Knees’를 작곡한 바 있는데, 영화 원작에는 없는 음악이 흑백의 영상과 호응하며 전혀 다른 전율을 선사한다. 역시 유명 영화 감독 대니 보일은 자신이 감독한 미국 드라마 ‘트러스트’ 속 영상을 재편집했고, 전시장에 놓인 빈티지 TV에서 영상이 흘러나온다. 라벨이 작곡한 ‘트러스트’ OST가 전시장을 메울 때, 관람객은 의자에 앉아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증상”을 느끼게 된다.

◇후각

영국 향기 디자이너 아지 글래서가 이번 전시를 위해 개발한 신향(新香)이 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마스크를 뚫고 잊고 있던 후각을 일깨운다. /고운호 기자

냄새도 작품이다. ‘향기의 방’에 들어서면, 마스크를 뚫고 비강 점막을 자극하는 독특한 향기를 감지할 수 있다. 코로나 시대가 상실케 한 본능의 회복, 향수 디자이너 아지 글래서가 이 전시에 참여한 이유다. 이 전시만을 위한 새로운 향을 개발해 선보인 것이다. 이 하나의 향기를 위해 혼합된 100여개의 향(향수병)이 전시장에 진열돼있다. 몰입형 전시의 선구자이자 이번 전시의 공동 기획자인 콜린 나이팅게일·스티븐 도비는 “향을 퍼뜨리며 박동하는 전시장의 심장과 같은 공간”이라며 “기존의 틀을 깨는 방식으로 음악과 교감하는 전시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촉각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저녁 식사 자리로 설정된 방이다. 촛농 범벅이 된 탁자를 만져도 되고, 피아노를 건드려도 된다. /고운호 기자

‘만지는 것’은 대부분의 전시장에서 금기시되지만, 여기서는 사정이 다르다. 뮤직비디오 속 배우처럼 곳곳을 누빌 수 있도록 의도했기 때문이다. 라벨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의 ‘체험형 앨범’을 만들고 싶었고 음악이 꿈처럼 살아 움직이도록 모든 요소를 동원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촛농의 방’에 이르러 관람객은 촛농으로 뒤덮인 기다란 탁자를 마주하게 되는데, 다소 음산하고 축축한 “시간의 누적”을 손끝으로 음미할 수 있다. 이곳은 유령을 위한 가상의 식사 자리이고, 이 만찬을 위해 구석에 피아노 한 대와 악보가 놓여있다. 건반을 건드려도 제지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소음이 또 다른 변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공간지각

제임스 라벨이 사랑하는 단어로 이뤄진 그라피티가 푸른 터널을 채운다. /고운호 기자

정해진 동선은 없다. 음반 속 사운드트랙을 무작위로 선택하듯 발길 닿는 대로 거닐며 길을 잃어도 좋다. 전시장 한편에 웬 낙서로 뒤덮인 버스 정류장이 들어서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작동을 잠시 멈춘 ‘여정’을 의미한다. 한국 여성 그라피티 작가 나나(Nana)와 서울서 협업한 작품으로, 벽면에 ‘MUSIC IS OUR SANCTUARY’(음악은 우리의 안식처)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정류장 옆 공중전화 수화기에 귀를 대보면, 가사가 또렷이 들려온다. 정류장을 지나면 그라피티로 가득한 푸른 터널이 나온다. ‘음악’ ‘너머’ ‘자유’와 같은 글자가 온몸으로 쏟아져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