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을 추구하면 예리함을 잃는다. 예술의 딜레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4년 만에 선보이는 기획전 역시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 후폭풍과 코로나 사태로 정상 가동을 멈췄던 리움이 쏘아 올린 부활의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이번 기획전은 미술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왔다. 그러나 기획전 주제가 ‘인간’으로 알려진 이후 “뻔한 전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일각에서 제기됐다. 너무도 포괄적인 만능 열쇠말이기 때문이다. 5일 열린 언론 사전 공개에서 미술관 측은 “2년 전 소장품 연구를 진행하다 ‘인간’을 다룬 작품이 많아 기획을 시작했다”며 “보편적 주제를 택해 소장품을 활용하자는 게 큰 방향이었다”고 설명했다.
초일류를 지향하는 리움의 컬렉션답게 전시장에는 이브 클라인, 루이즈 부르주아, 앤서니 곰리, 백남준 등의 대작 130여 점이 즐비했다.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이 제작한 거대한 남성 얼굴(‘마스크II’) 등 덩치 큰 설치미술도 길목마다 배치해 시각적 쾌감도 높였다. 그러나 ‘인간’의 챕터로 편입되면서 작품별 다채로운 번역의 가능성은 약해지고, 일차원적 해석에 갇히는 인상을 줬다. 곽준영 큐레이터는 “이 부분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면서도 “코로나를 겪으며 이 시기가 아니면 또 이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이라는 전시 제목처럼, 전시는 구상(具象)으로서의 인간(초상)에서 출발해 신체→퀴어→사회→혼종 등의 순으로 나아간다. 성 정체성 혼재 작가 야스마사 모리무라가 여러 캐릭터로 분장해 촬영한 사진 연작 등 파격적 작품도 배치돼있지만 ‘휴먼’에서 시작해 ‘포스트 휴먼’으로 진행되는 도식이 예측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전시의 문을 여는 건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 ‘거대한 여인III’다. 가격이 1000억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으로도 각광받은 리움의 대표 소장품이다. 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기획전 전시장 진입 통로 가장자리에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한 정구호 디자이너는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경사로 위에 전시작이 놓인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작품 가치만 따지고 보면 전시장 한가운데 놔야겠지만 시선이 분산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마지막으로 다시 바라보며 ‘인간’에 대해 반추할 수 있도록 동선을 의도했다”고도 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 이슈와도 맞물린 작품이지만, 미술관 측은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은 바 없다”고 했다.
상설전이 차라리 빛나는 양상이었다. “2014년 이후 새 주제로 전면 개편하고 지금껏 전시되지 않던 작품을 대거 소개”하는 자리다.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등 근현대미술 거장 뿐 아니라, 국보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 김홍도 ‘군선도’ 및 고려 말~조선 초 제작된 유일 팔각합 ‘나전팔각합’ 등이 처음 놓였다. 특히 고미술 상설전은 청자·백자·금속공예 등 장르로 나누던 종전 방식에서 탈피해 ‘권위와 위엄, 화려함의 세계’(1 층) ‘감상의 취향’(2층) ‘흰빛의 여정’(3층) ‘푸른빛 문양 한 점’(4층)처럼 특징별로 꾸려 큐레이션의 여지를 넓혔다. 분청사기 앞에 박서보의 그림 ‘묘법’을 거는 식으로 현대미술과도 적극 조화를 꾀했다. 상설전은 올해부터 무료로 전환된다.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2018년 리움 운영위원장으로 왔고, 지난달 1일 김성원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가 새 부관장으로 선임됐다. 김 부관장은 “이서현 위원장이 밝힌 운영 방침은 한국 작가를 세계에 알리고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선대 회장의 유지를 잇는 것”이라며 “이미 잡힌 전시가 마무리되는 후년 말부터 ‘리움 스타일이 아닌데?’ 싶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움은 8일부터 공식 재개관하고,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도 40년 만에 처음 내부를 전부 철거하는 대공사를 마치고 같은 날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