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반동(反動)이다. 거꾸로 그렸기 때문이다. 위아래가 뒤집힌 그림이 미술계를 뒤집었다. “예술가는 반(反)사회적이다. 공동체 안에 머무르지 않고 거기에서 떨어져 나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술가가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화가 게오르그 바젤리츠(83)가 속내를 밝혔다.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 베네치아 아카데미아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 최초의 생존 작가, 이른바 ‘거꾸로 된 그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가 이달 초 서울 분점을 개관한 타데우스로팍 갤러리 국내 첫 전시에서 다음 달 27일까지 최신작을 선보인다. 바젤리츠 회화의 상징과도 같은 ‘반전(反轉) 인물화’ 10점도 출품됐다. “관습에 대한 반항”으로 곧잘 해석되곤 하는 전매 특허 대작(大作)이다. 바젤리츠는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이 경우 평론가들의 해석이 맞는다”고 했다. 이번 그림은 모두 그의 아내 엘케(Elke)를 모델로 삼았다. “아내를 60년 동안 그려왔다. 더 이상 엘케는 내가 본인을 그리는 걸 놀라워하지 않는다.”
“아무도 원치 않던 그림을 그려 화제가 됐다”는 고백처럼, 청년 시절부터 바젤리츠는 수음하는 난쟁이(‘하수구 아래의 진한 밤’) 등의 문제적 회화로 검찰에 그림을 압수당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뇌에서 바로 나온 것들이었다”고 했다. 이후에도 그는 독일을 휩쓸고 있던 미국발(發) 추상표현주의 물결 속에서 반대로 헤엄쳤다. 구상(具象)을 택했다. ‘얼굴은 위, 다리는 아래’라는 오랜 상식을 엎었다. 1969년이었다. “이후 초현실주의적인 모티프가 사라지고 구체적 형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뒤집음으로써 그림에서 서사를 도출하려는 관람객의 의도를 방해하고, 오로지 표현에만 집중케 한 것이다.
똑바로 그린 뒤 캔버스만 거꾸로 걸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가 반문했다.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럼 예술가는 어디에 있게 되는가?” 이번 전시 출품작은 지난해부터 시도한 또 다른 실험의 결과다. 땅바닥에 눕힌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려 그림을 완성한 뒤,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크기의 빈 캔버스를 엎어 찍어내 남긴 흔적이기 때문이다. 뭉개진 물감이 반(半)구상, 반추상의 효과를 낳는다. “나 스스로가 일본 화가 호쿠사이(1760~1849)처럼 느껴지곤 했다. 호쿠사이는 늦은 나이까지도 자신의 작업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또 시작하기를 반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56년 동베를린미술아카데미에 다니다 ‘정치적 미성숙’을 이유로 쫓겨난 뒤 이듬해 서베를린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독재 정권에서는 오직 선전 미술만이 유효했다. 그것이 내가 공산주의로 향해 있지 않은 이유다. 나는 권력을 갖고 장난치거나 그러한 권력에 굴복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운 좋게도, 늘 독립적인 미술 시장은 존재했고 그 덕에 예술가들이 권력에 복종하거나 유린당하는 사회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분단과 통일, 독일과 한국은 서로를 비추고 있다. 화가가 “이곳과 그곳의 예술은 두 개의 거대한 기념비”라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여러 아시아인을 만났다. 항상 그들의 문화에 경외심을 지녀왔다. 과거 한국이 처했던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도 깊이 통감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한국이 공산주의에서 분리된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