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은지화 '게와 아이들'(8.5×15㎝). 게는 궁핍했으나 가족과 정겨웠던 서귀포 시절을 회상하며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다. /이중섭미술관

화가 이중섭(1916~1956)은 흔히 ‘소’의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잖게 즐겨 그린 소재가 바로 ‘게’다. 전쟁을 피해 1951년 가족과 함께 제주도 서귀포에 당도한 이중섭은 끼니를 위해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자주 잡았다. 마을 반장에게 얻은 4.6㎡ 남짓 단칸방에서 생활하던 시절이다. 이중섭미술관 전은자 큐레이터는 “게를 반찬으로 삼은 게 미안했던지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게 그림’을 많이 그렸다”며 “게는 마치 가족처럼 그의 그림과 편지에 등장한다”고 했다.

8일 제주도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린 ‘2021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는 여느 때보다 화가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성’에 대한 고찰이 두드러졌다. 이는 올해 초 이뤄진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도 궤를 같이한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이 기증한 은지화 ‘게와 아이들’ 포함, 12점의 원화(原畵) 모두 서귀포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온 유화 6점·수채화 1점·은지화 2점·엽서화 3점이 제주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서 내년 3월 6일까지 ‘70년 만의 서귀포 귀향’ 특별전에서 공개된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 올해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된 1951년 작‘섶섬이 보이는 풍경’(32.8×58㎝). 이중섭 유족 측은“아버님께서도 흩어져있던 작품들이 제작된 현장으로 돌아온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축사를 보내왔다. /이중섭미술관
이중섭미술관에서 바라본 섶섬 - 3층 옥상의 탁 트인 풍경. 초가는 사라졌어도 섬은 그대로다. /정상혁 기자

이중섭이 머물던 집은 왼쪽으로 섶섬, 오른쪽으로 문섬·새섬이 보이는 곳이었다. 기증작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당시 화가가 바라본 서귀포 해안의 모습을 담고 있어, 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보는 현재 풍경과 비교하는 재미가 크다. ‘해변의 가족’ ‘아이들과 끈’ 등 가족과의 유대를 보여주는 그림뿐 아니라, 종이 앞면에 비둘기와 아이들, 뒷면엔 연 날리는 아이들이 그려진 귀한 양면화도 “역사적인 해후”를 맞았다. 배급 식량과 고구마로 연명하던 궁핍한 나날이었지만, 서귀포의 그림은 대체로 따스하다. 전 큐레이터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결과”로 해석했다.

원화 및 팔레트·사진 등 자료까지 이 미술관 전체 소장품의 약 87%가 기증품이다. 전 큐레이터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도 소장가들의 품격 있는 기증으로 명소가 될 수 있었다”며 “명작의 기증은 기증자의 사연이 더해지며서 더 큰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내년 20주년을 맞는 미술관은 이번 기증과 시설 확충을 통해 제2의 개관을 준비 중이다.

이중섭이 남긴 몇 안되는 양면화. 종이 앞면에는 비둘기와 아이들, 뒷면에는 연날리는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이중섭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이중섭 작품만 104점을 얻었다. 서울관에서 내년 3월까지 열리는 기증 특별전은 암표가 나돌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날 세미나 두 번째 연사로 나선 윤범모 관장은 이중섭 그림의 조형적 특성을 ‘원형 구도’로 분석하며 “화면의 안정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표현코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엔 김태엽 서귀포시장, 오광협 전(前) 서귀포시장, 강명언 서귀포문화원장, 김병수 전 서귀포문화원장, 홍명표 한국관광협회 상임고문, 오광수 이중섭미술관 명예관장, 이왈종 이중섭미술관 운영위원장, 고영우 기당미술관 명예관장, 이나연 제주도립미술관장, 변종필 제주현대미술관장, 최형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장, 이승택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고순철 한국미술협회제주지회 서귀포지부장, 한동철 정방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김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이중섭 사촌 형 이광석 변호사의 아들 이태호씨, 이중섭에게 셋방을 내준 김순복 할머니의 딸 송경생씨, 김문순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과 제주도민 30여 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