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 사후 처음 공개된 시화(34x57㎝). 김사림의 시 두 편이 좌우로 적혀있다. 글씨 주인은 오리무중이다. /©윤성렬·PKM갤러리

“시화(詩畵)란 한 지면에 시인과 화가가 공존하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시인대로, 화가는 화가대로의 세계를 그려서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추상회화 거장 윤형근(1928~2007)은 1978년 공책에 이렇게 썼고, 시와 그림이 함께 머무는 그 세계를 만들었다. “우선 시가 들어갈 공간을 생각해서 아래 쪽에 그려 봤다 … 여러 장을 그려서 그중에서 마음에 든 편을 골랐다. 그러나 부족한 느낌이다. 하기사 만족한 것이 그리 쉽게 만들어진다면야 또한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작업을 계속하게 마련인가 보다.”

윤형근이 남긴 미공개 드로잉·메모 등 자료 70점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PKM갤러리가 최근 출판사를 차려 출간한 책 ‘윤형근의 기록’에 수록됐고, 서울 삼청동에서 무료 전시도 14일까지 열린다. 단연 눈길을 끄는 건 누런 한지(韓紙)에 그려진 한 점의 시화다. 윤형근이 남긴 시화로는 지금껏 유일할뿐더러, 이 글씨를 쓴 사람이 윤형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형근 회화를 대표하는 흙색(Umber)과 감색(Ultramarine)의 물감이 다섯 개 작은 기둥을 이루고, 위 여백에 시인 김사림(1939~1987)의 시 두 편(그리는 마음·그 겨울 눈사람)이 적혀 있다. 갤러리 관계자는 “화가의 서교동 작업실에서 2016년 유작 정리 작업 도중 발견됐다”며 “그림은 윤형근이 그린 게 확실하나 글씨는 윤형근의 필체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썼을까? 제작 연도, 화가와 시인의 관계조차 연구자 및 유족들도 아는 바가 없는 상태다.

시와 그림을 하나로 여겼던 윤형근은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회화는 유형의 시”라며 “동질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표현에 있어서 다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시화는 미술계가 풀어야 할 연구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