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안에 한 해가 담겨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최근 특별한 VIP 달력을 제작해 주요 관계자에게 무료 배부했다. 재불(在佛) 설치미술가 이슬기(49)의 누비이불 작품 12개로 꾸민 2022년용 탁상 달력이다. ‘굴러 온 호박’ ‘이왕이면 다홍치마’ 등 한국 속담을 경남 통영 누비 장인과 협업해 색색의 전통 누비 이불로 표현해낸 작가의 대표작이지만, 국내 대표 미술관이 내세운 신년(新年)의 첫 얼굴이라는 점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리움 측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가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확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본디 달력과 그림은 한 묶음이고, 주요 고객 등을 위해 소량 제작되는 미술계 VIP 달력은 미술 시장의 최신 경향과 화제성을 판독할 수 있는 지표다. 특히 삼성 VIP 달력은 선별 작품(김환기·천경자·이우환 등)과 인쇄 품질 덕에 고가(高價)에 거래될 정도로 소장 가치가 높았으나 2016년 이후 제작 중단됐고, 지난해부터 리움 측이 자체 제작해오고 있다. 이번엔 5000부를 찍어냈는데, 한 작가의 작품으로만 꾸민 건 첫 시도다. 지난 2월 폐막한 조선일보 100주년 특별전 ‘ㄱ의 순간’에 출품해 크게 각광받았고, 3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 작가가 올해 괄목할 작가로 발돋움했음을 방증하는 장면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사은용 2022년도 달력을 1300부 소량 제작했는데, 이례적으로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작품으로만 꾸몄다. 지난 7월 권진규 유족 측의 조각·그림 140여 점 기증이 미술관 차원에서 가장 굵직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학예실 측은 “기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며 “내년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전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 2023년에는 기증품을 위해 20년 만에 새 상설 전시 공간을 마련할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VIP 달력을 제작해, 1월부터 12월까지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출품작을 골라 소개하는 자기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
기업발(發) VIP 달력은 화가의 대중적 명망을 보여주는 지표다. 내년에도 박서보(한국수출입은행), 이왈종(대신증권) 등 경매 시장 활황의 주역들이 다수 포진했다. 명상적인 기운을 주거나, 따스하고 밝은 이미지가 새해의 조건에도 부합하는 까닭이다. 지난 1월 별세 이후 올해 상반기 경매 시장의 가장 뜨거운 이름으로 떠올랐던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은 삼성생명의 간택을 받았다. 영롱한 물방울이 길한 기운을 풍겨 이미 달력 그림으로 사랑받아온 작가이나, 지난 5월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14억3000만원으로 작가 최고가를 경신하며 세계 미술 시장의 주류에 입성했다는 점에서도 대기만성의 의미를 더한다.
주로 서양 거장(巨匠)을 달력 그림에 선별해온 신세계백화점은 이번엔 스페인 화가 피카소(1881~1973)를 낙점했다.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수퍼스타이면서,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가 22일 발표한 올해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던 미술 전시 1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개막한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프랑스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이 소개된 국내 최초 전시로, 6·25전쟁의 이념 갈등이 드러난 문제작 ‘한국에서의 학살’이 7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아 연일 코로나 사태를 무색하게 하는 장사진을 이뤘다. 신세계 측은 “피카소처럼 한계 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는 의미”라고 달력 제작 이유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