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이탈리아 베네치아 고성과 고택이 한국 미술로 불 밝힌다. 오는 4월 시작되는 세계 최대 미술 축제 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 전광영·이건용·하종현·박서보 등 국내 거장들이 잇따라 도시 전역에서 전시를 개최해 작품 세계의 정수(精髓)를 뽐내기 때문이다. 이 기간 베네치아는 국제 미술계 핵심 장소가 되는 데다, 이번에는 코로나 사태로 비엔날레 행사가 1년 연기돼 열리는 만큼 각별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 미술의 개성과 저력을 알릴 절호의 기회로 평가받는다.
심장이 뛰고 있다. 한지(韓紙)로 제작된 거대한 심장, 그 주변에서 맥박 소리가 울린다. 실제 병원에서 녹음한 환자의 심장 소리가 허약하지만 동시에 건강을 희구하며 진동한다. 이 설치작 ‘심장’은 옛 한약 봉지처럼 고서(古書)로 삼각·사각의 스티로폼을 감싼 뒤 서로 이어붙여 완성한 전광영(78) 작가의 전매특허 ‘집합’ 연작이다. 작가는 “재생의 재료 종이로 인간 회복이라는 생태학적 메시지를 전달코자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 중 가장 주목되는 전시로 한지 작가 전광영의 개인전이 손꼽힌다. 수백 년 된 고택(Palazzo Contarini Polignac)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우리 고유의 한지를 소재로 한 독특한 작품 세계를 알린다는 의미가 크다. 치유의 생물 나무, 나무에서 비롯한 한지, 그것을 지식 축적의 바탕으로 삼은 책을 재료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코로나 시대의 상처 회복을 위한 은유가 된다.
특히 이탈리아 저명 건축가 스테파노 보에리(66)와의 협업도 기대를 모은다. ‘수직 숲’ 설계로 유명한 보에리가 전광영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종이 소재 삼각꼴 형태의 ‘한지 하우스(Hanji House)’를 지어 전시장 옆에 설치하는 실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꽃 형태의 반투명 코로나 백신 접종소를 설계하며 외신의 큰 주목을 받았던 건축가가 이번엔 한지라는 공통의 재료로 치유의 장소를 모색하는 것이다. 여기에 개막 첫날 생태학자 최재천, 한국계 미국인 설치미술가 아니카 이 등이 참여하는 세미나를 열어 국제적 시각으로 생태 위기 시대의 예술과 도시를 고찰한다는 계획이다.
첫 미술 한류 신호탄을 쐈던 단색화 거장들도 출격 대기 중이다. 화가 하종현(87)은 전시장 팔라제토 티토(Palazzetto Tito)에서 자신의 60년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을 개최한다. 전쟁통 군량미를 담던 마대를 캔버스 삼아, 뒷면에 물감을 짠 뒤 밀대로 짓이겨 앞면으로 밀어내는 배압법(背押法)의 결과로 완성된 ‘접합’ 연작 등을 통해 “단색화의 현주소를 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단색화 열풍을 주도하는 화가 박서보(91) 역시 퀘리니 스탐팔리아(Fondazione Querini Stampalia)에서 열리는 일본계 미국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 베트남계 덴마크 설치작가 얀 보와의 3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단색화 열풍을 재점화하는 주요 계기가 될 전망이다.
한국 1세대 행위예술가이자 최근 시장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화가 이건용(80)도 팔라초 카보토에서 개인전을 연다. 회고전 성격이 아니라 최신작을 보여주는 자리다. 그래서 출품작 대부분은 캔버스 정면이 아닌 뒤편에서 작가의 신체 범위만큼 붓질해 화면에 흔적을 남기는 대표작 ‘바디 스케이프’(Bodyscape) 연작으로 구성할 예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