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대체 불가능 토큰)는 지난해부터 급격히 부상한 미술계의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디지털 미술 작품에 대한 블록체인상의 소유권을 가상 화폐로 사고파는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가 열리면서, 기존 미술 시장 질서에서는 각광의 기회가 없던 신진 작가들이 속속 스타덤에 올랐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 작품을 올리고 직거래하며 팬덤을 형성하는 ‘탈중앙화’의 낙관론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막강한 자본과 네트워크를 보유한 대형 갤러리 및 미술관까지 NFT 시장에 뛰어들면서 ‘탈중앙화의 중앙화’라는 역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NFT 시장에 진출하는 명화들 - 갤러리현대 측 주도로 NFT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한국 미술 거장들. 왼쪽부터 이중섭 ‘황소’와 김환기 전면점화, 이건용 ‘바디 스케이프’ 합성 사진. /게티이미지뱅크·에이트

“현실 세계에서 인정받은 작가로 NFT 시장에서 경쟁하겠다.”

최근 갤러리현대 도형태 대표가 NFT 회사(‘에이트’)를 론칭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화랑이 NFT로 본격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이들의 야심 찬 카드는 김환기·이중섭 등 이미 거액에 팔리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곽인식·이승택·강익중 등 갤러리현대와 관계 깊은 유명 작가들이 역시 후속 대기 중이다. 에이트 측은 “미국에서 먼저 인기를 끈 ‘크립토아트’는 예술적 가치에 본질적 의문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며 “현재 미술시장에서 증명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NFT 가격에 합리성을 부여하겠다”고 했다. 오프라인에서 값비싸게 거래되는 그림이라면, 아무리 디지털 소유권뿐인 NFT 거래여도 높은 가격표가 납득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판매 방식 및 가격을 더 구체화해 8월 정식 출범한다는 계획이다.

아직 초기 시장이지만, 지금껏 NFT의 총아는 대개 뉴페이스였다. 컴퓨터 이미지 파일을 모아 제작한 그림 한 점이 약 800억원에 팔려 NFT 미술 시장의 전기를 마련한 미국 작가 비플(40), jpg 파일 하나가 수백억원을 호가하는 그림 ‘크립토펑크’ 연작의 제작사 라바랩스 등이 그 예다. 기존 방식으로 이름을 알리기 어려웠던 작가들이 기성 갤러리나 경매를 거치지 않고도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페이스 등 세계적 갤러리가 발 빠르게 진출하면서 NFT는 점차 기성 미술계로 편입되는 모양새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이 최근 NFT로 제작해 1만개로 쪼개 판매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 /ⓒBelvedere, Vienna

미술관도 적극적이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걸작 ‘키스’를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은 최근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국내에서도 ‘키스’ NFT 판촉에 나섰다. 디지털로 변환한 그림을 1만 조각으로 나눠 개당 약 1850유로(250만원)에 파는 것이다. 스텔라 롤리그 벨베데레미술관장은 “NFT는 재정적 측면에서 진지하게 고려할 기회이면서 즐거움을 주는 새로운 참여의 형태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품인 호쿠사이 및 윌리엄 터너의 그림,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의 NFT 판매 사업을 진행하는 등 흐름은 확산하고 있다.

NFT 시장이 기성 미술계 중심으로 재편되면 일단 안정성이 생긴다는 장점은 있다. 대중적 접근성이 높아지고, 단골 분쟁 요소인 저작권 문제 등 사기 가능성 감소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진 작가보다는 기존의 명망 있는 작가들이 NFT 수익마저 석권하게 될 공산이 크다. 현 시점에서 NFT는 향유보다 투자 성격이 강한 만큼 이름값에 눈길이 쏠리기 쉬운 탓이다. 실제로도 외국과는 달리 국내 NFT 시장에서는 연예인 화가 및 기성 작가에 밀려 돋보이는 신인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 실정이다.

영국 대영박물관 역시 실물 소장 중인 일본 판화가 호쿠사이의 대표작 '가나가와의 큰 파도'를 NFT로 제작해 판매했다. /BRITISH MUSEUM

NFT는 명화(名畵) 등 보유 자산이 많은 주류 미술계에 더 큰 기회로 작용한다. 쉽게 비유하면 NFT는 물건이 아니라 계약서를 사고파는 것이다. 원화(原畵)를 디지털로 원하는 만큼 복사해 팔 수도 있고, 판매된다고 저작권 변동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구매자가 얻는 건 그저 ‘이건 내 거’라는 블록체인상의 기록뿐이기 때문이다. 해당 작품에 대한 배타적 사용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한 NFT 관계자는 “현재 NFT 구매로 얻을 수 있는 건 가장 트렌디한 방식의 만족과 향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뿐”이라고 했다. 이 욕망이 식는 순간 NFT 시장은 급격히 냉각될 공산이 크다.

NFT 전문가 캐슬린김 변호사(미국 뉴욕주)는 “기성 미술계가 실물 그림을 디지털로 옮겨 판매하는 데 그쳐서는 현재의 유행이 새로운 사조를 창출하기 어렵다”며 “현상에서 미래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회사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NFT 시장 규모는 약 410억달러(49조원)로 기성 미술시장 규모에 근접한 것으로 파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