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도 볼 수 있다. 심상(心象) 때문이다.
화가 윤중식(1913~2012)은 말년에 이르러 시력을 거의 잃었다. 노안(老眼)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화가는 젊은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쨍한 천연색으로 곳곳을 채웠다. 특히 산수유꽃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노랑을 옷과 얼굴에 아낌없이 펴발랐다. 입가에 수줍게 미소가 번져있다.
화가가 마지막 호흡을 거두기 얼마 전 완성한 그림 ‘무제–부인’(2012)이 처음 공개된다. 10주기를 맞아 유족 측이 서울 성북구립미술관 측에 500점의 그림·자료를 무상 기증했고 이를 미술관이 특별전으로 30일부터 선보이는 것이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고인은 6·25 당시 피란길을 떠났는데, 난리 통에 해주 근방에서 아내와 첫째 딸을 잃어버렸다. 큰아들과 젖먹이 둘째 딸만 데리고 월남했으나 곧 딸마저 세상을 떴다. 생이별을 겪고 서울에 정착했다. 제2의 고향에서 새로 가정을 일궜다. 그래서 이 초상은 어렵게 되찾은 일상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고, 이후 평양에서 이중섭·문학수·김병기·황염수·이호련과 6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향토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그의 색조 짙은 그림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고향 풍경처럼 지금은 볼 수 없는 장면을 그는 화면에 옮겼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봤다. 은둔의 화가였다. 김경민 학예사는 “대외 활동보다 주로 자택에서 작업한 시간이 길다 보니 가족 그림이 많다”며 “가난해도 일상을 그리며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들·딸·손녀 등을 그린 그림도 상당수 공개된다.
올해는 화가가 성북동 145번지로 이사 온 지 꼭 60년 되는 해다. 장남 윤대경(75)씨는 “선친이 반백년 화업에 충실할 수 있던 이곳은 고향땅이나 마찬가지”라며 “전시를 준비하던 도중 선친의 스크랩북에서 구립미술관 기증을 위한 자필 메모를 발견했다”고 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윤중식 가옥 앞에는 수령 200년 넘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두문불출, 마지막 날까지 창밖으로 바라봤을 이 풍경 역시 화가는 그림으로 남겼다. 전시는 그의 기일(7월 3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