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韻共樂(여운공락), 딱 네 자다.

서예가 일중 김충현(1921~2006)은 이 집에서 마지막 글씨를 썼다. 운을 나누며 함께 즐거워하라는 뜻이었을까? 아마 노구에 남은 힘을 모두 끌어다 네 글자를 쓰고 만금 같은 붓을 내려놓았을 테다. 아이가 쓴 듯 소박하다. 절필의 순간 노(老)대가의 마음에 소용돌이쳤을 소회를 다 헤아릴 길은 없다. 붓이 머물다 떠난 텅 빈 종이에는 붓놀림의 흔적만 여실하다. 종이는 먹물을 빨아들이는데, 종이엔 붓의 망설임, 휘몰아치는 결단과 파국, 단호한 맺음의 흔적이 남는다.

사랑방에 딸린 누마루 창을 열자 먼동이 먹빛을 밝히며 새벽의 형상을 드러낸다. 일중의 친구였던 서예가 월당 홍진표가 써 선물한 붓글씨(‘노초황화실기’)도 보인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매화 향기가 고운 입자로 떠도는 봄밤, 북악산 아래 자리한 ‘보현재’를 찾았다. 예서(隸書)의 대가였던 일중이 말년의 거소로 삼았던 한옥이다. 그 한옥을 고쳐 지난해 2층으로 된 전시장으로 개관했고, 위 글씨도 이곳에 걸려있다. 일중은 중동중학 1학년 신분으로 서예 공모전에서 한글 서예로 재능을 뽐냈다. 조선 선비 김상헌의 14대손 일중은 선각이 이룬 정법을 본받고 따르되 매이지 않고, 표현의 자유로움을 어여삐 여기며 필법을 세웠다. 우리는 몸을 먹과 함께 갈아 종이 위에 쏟은 예인과 그 소슬한 성취에 겸손해야 한다. 한글과 한문 서예에 능통하고, 현판·주련·기문·상량문 등에 두루 필적을 남긴 일중에게 서예는 불가능함에의 투신이고, 깨달음의 집약이며, 예도의 완성이었을 것이다.

서예는 글씨인가, 그림인가. 한때 나는 그런 범박한 물음을 품었다. 붓은 돛 단 범선이 바다를 가르며 나가듯이 종이 위에 미끄러지고 흐르며 휘감는 놀음으로 글자를 짓는다. 붓은 필기 도구가 아니라 유희 도구인 셈이다. 문자는 항상 흘러간다. 이 흐름이 포획하는 것은 풍(風)과 골(骨)과 채(彩)다. 셋의 어울림 속에서 서예는 얼의 깊이와 관능적 품격을 얻는다. 서예야말로 필묵의 자취로 구현하는 표현 예술이자 문학과 시각예술이 섞이고 스민 융복합 장르일 것이다.

보현재 사랑방에서 실제 일중이 쓰던 탁자 앞에 앉았다. 서예의 흔적 위에서 글을 써내려 간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층 안방은 일중이 작업실로 쓰던 곳이다. 지금도 보료가 깔려 있고, 몇 겹 접힌 낡은 가죽이 놓인 앉은뱅이 탁자가 있다. 일중은 가죽을 펼친 뒤 무릎을 꿇은 채 일필일획(一筆一劃)에 혼을 담아 글씨를 썼을 것이다. 달의 인력은 바닷물을 달 쪽으로 끌어당기는데, 마치 달의 인력에 이끌리듯 나는 탁자 앞에 앉는다. 탁자 위에 노트를 펼치고 들숨과 날숨을 고르게 내쉬며 생각을 적는다. 한 사람은 글씨를 썼고, 한 사람은 글을 쓴다. 글과 글씨는 분별이 엄연하지만 둘은 저 깊은 데서 상통한다. 글과 글씨의 관계는 얼과 몸의 관계일 테다. 세대를 넘는 교감의 찰나가 스칠 때 일중과 나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았음을 깨닫는다.

붓글씨는 어떻게 예술의 작위를 얻었나. 서예는 붓의 예술이 아니라 텅 빈 손목의 예술! 손목의 힘을 빼서 붓을 자유자재로 놀리되 그 안에서 문자의 균형과 조화를 찾는다. 서예는 피의 불가결한 기질과 기분과 취향에서 리듬을 구하고, 대의와 가치관에서 그 형식의 심오함을 얻는다. 비약하자면, 유교 문화권에서 자기 수양과 교양의 중추라는 소명을 다한 붓글씨는 의고주의(擬古主義) 예술로 잔존의 명분을 발견한다.

일중이 손주에게 써 준 한글 글씨. 보현재 1층 안방에 걸려 있다. "잘 자라고 공부 잘 하여라."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일중은 알츠하이머로 인해 1997년 이후 붓을 들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쓴 글씨라고 알려진 '여운공락'이 보현재 2층에 걸려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일중에게 서예는 보상 가능한 꿈을 좇는 일이었을까? 나는 차 몇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집 안을 서성였다. 빽빽한 고요 속에서 일어나는 스침과 흐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혼돈과 별의 찬란함을 품은 채 밤이 스러지고 있다. 새벽은 저 먼 데서 온다. 일출 직전 희부윰한 빛이 북악 능선을 돋을새김으로 드러낼 때 나는 완전연소 된 듯하다. 그동안 내 수염이 자랐을 테다. 지난 자정의 나와 새벽의 나는 동일한 사람일까. 이 하룻밤이 내면 형질 어딘가를 미묘하게 바꿔 놨을지 모른다. /장석주 시인

☞시인 장석주는?

1955년생. 소문난 다독가이자 애서가. 1975년 ‘월간문학’,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시세계’ ‘현대예술비평’을 펴내는 등 출판계에도 오래 몸담았다. 마광수의 문제적 시집을 발행한 청하출판사 설립자이기도 하다. 최근 대표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를 냈고,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보현재(普賢齋)는…

서울 평창동 '일중의 집-보현재' 건물 전면.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국필’(國筆)로 불렸던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직접 마련해 1995년부터 2006년 별세 전까지 머문 서울 평창동 가옥이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예업을 기리기 위한 전시 공간으로 재단장해 개관했다. 평생을 두고 완상했던 일중의 애장품과 대표작이 함께 머무는 서화의 아늑한 거처다. 너머로 보이는 북한산 보현봉에서 이름을 따왔다.

공간은 1·2층으로 나뉜다. 작업실이자 생활 공간인 1층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화가 고희동의 ‘괴석도’, 중국 청나라 주당의 석지도 등이 곳곳에 예기(藝氣)를 불어넣는다. 서세옥·장우성·문신 등 동시대 거장들에게 선물받은 시서화 및 조각도 볼거리다. 손때 묻은 붓과 벼루, 직접 손주들에게 남긴 한글 글씨도 아름답다. 2층은 일중의 대표 글씨를 선별한 전시장이다.

일중은 자신이 아끼던 수석(壽石)과 나무와 화초를 옛집에서 그대로 옮겨와 심었다. 1979년 쓴 한시 ‘거석비우(巨石飛雨)’의 소재가 된 큰 바위도 앞마당에 놓여있다.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들국화가 이곳에 핀다. /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