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에는 언제나 드라마가 있다.
전 세계 최대, 그래서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내일(23일) 공식 개막한다. 각국의 창의력이 격돌하는 격년제 국제 미술전을 일컫는 단어 비엔날레(biennale)가 127년 전 바로 이곳에서 비롯됐고, 코로나 사태로 3년 만에 열리는 첫 행사이기에 여느 때보다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는 인류의 확장성을 주제로 80국이 출격해 11월 27일까지 대장정을 이어간다. 언론 사전 공개 기간 현지에서 전시장을 미리 둘러봤다. 국가대표마다 사연이 짙다.
◇파국 직전에 회생한 한국관
파국 직전에 회생했다. 설치미술가 김윤철(52)씨가 제작한 빛의 광물이 그 증거로 전시장을 채운다. 색과 패턴이 끊임없이 변하는 764개 셀(cell)로 거대한 금속성 용의 형상을 구성한 작품 ‘크로마 V’ 등 설치작 7점이 실험실 돌연변이처럼 공간을 장악한다. 특수물질과 광학이라는 생경한 김씨의 전매특허가 이따금 서구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는 제작 기간 3개월이라는 가히 ‘한국적 속도전’의 결과다. 다른 나라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전시 주제 ‘나선’은 안과 밖이 맞물리는 혼란의 회전 양상을 함의하는데, 한국관의 현실과도 정확히 맞물린다.
첫발부터 꼬였다. 지난해 예술감독 선정 당시 불공정 논란이 불거져 최종 결과가 무효화되고, 연말에는 참여 작가가 예산 지급 등의 갈등으로 예술감독 이영철(65) 계원예대 교수에 대한 진정을 제기해 해촉 절차가 진행되는 초유의 사태가 본지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작가는 “‘한국관 왜 저래’라는 말 듣기 싫어 이 악물었다”며 “제대로 된 예술 행정을 통해 구태를 매듭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관을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측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놀라운 건 영국 미술 매체 아트뉴스페이퍼가 올해 비엔날레에서 꼭 봐야 할 국가관 전시 중 하나로 한국관을 꼽았다는 점이다.
◇전쟁이 야기한 예상 밖 스토리
러시아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참여 작가와 예술감독이 침공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유로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불 꺼진 유리창 안으로는 방치된 목자재가 보일 뿐이었으나, 행인 상당수가 이곳의 침묵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국가관은 ‘비엔날레의 심장’으로 불리는 자르디니 공원에 산재해 있다. 1995년 마지막으로 들어선 한국관까지 모두 29곳인데, 러시아관은 한국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행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비엔날레 측이 지지와 연대를 천명했기 때문이다. 미국관 앞 흙밭에는 흰 모래 포대를 한가득 쌓은 ‘우크라이나 광장’까지 들어섰다. 참호 구축하듯 안전과 보호의 몸짓을 의미한다. 비엔날레 총감독 체칠리아 알레마니(45)는 “잔인한 전쟁의 시대에 예술을 생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비엔날레의 역사는 이곳이 대화의 장이자 정치에 도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그래도 휴머니티는 영원히
프랑스(영화)·벨기에(놀이) 등 전통의 강호들은 각자의 무기로 연일 엄청난 인파를 모으고 있다. 예술 강국 네덜란드는 그러나 1953년부터 사용하던 자국 국가관을 올해 에스토니아에 내줬다. “과거의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전시장을 가장 적절히 활용할 국가에 할당하자”는 내부 의견을 토론 끝에 수용한 것이다. 전례 없는 일이다. 대신 네덜란드는 베네치아 북쪽 13세기 교회를 빌려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실험을 감행했다.
북유럽관은 올해 간판을 ‘사미(Sámi)관’으로 바꿔 걸었다. 사미는 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 북부 소수민족으로, 영토 전반에 걸친 문화와 혈통의 유대로 세 나라가 함께 유목 전통을 활용한 생태 전시장을 꾸민 것이다. 전시 관계자는 “사미는 러시아 일부 지역까지 닿아있다”고 말했다. 문 닫힌 러시아관 바로 맞은편에서 공존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