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과 유럽 왕가의 아취(雅趣)가 빈에서 조우했다.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21일(현지 시각)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물관(Weltmuseum Wien)에서 개막한 ‘책거리: 우리 책꽂이, 우리 자신’ 전시에서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기둥을 한 서양 건축물에 한국에서 온 책거리 그림이 전시됐다. ‘책과 물건을 그린 그림’을 뜻하는 책거리는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조선시대 왕부터 백성까지 즐겼던 예술이다. 특히 책과 그림을 사랑한 정조가 ‘애정한’ 그림이었다.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을 두는 관례를 깨고 책거리 병풍을 펼쳐놓을 정도였다.
빈 세계박물관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실 컬렉션을 중심으로 1891년 세운 ‘빈 미술사박물관’ 산하 박물관이다. 수집벽이 유난히 강해 전 세계 기물을 그러모았던 합스부르크 왕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방대한 소장품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엔 미디어 아트 작가부터 민화 작가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작가 24명이 책거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 31점이 나왔다. 책가도에서 영감받은 ‘서재’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홍경택과 중잔 한국화가 박대성을 비롯, 20여 년간 민화와 책거리 전통을 이어온 정성옥 등이 참여했다. 민화 작가로 활동하는 고(故) 구본무 LG 회장 부인 김영식,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부인 정재은의 작품도 출품됐다. 책가도에 젊은 감각을 더한 이화영·문선영, 디지털 아티스트 이돈아의 작품도 참여했다. 가수 송민호도 팝아트 작품을 내놓아 현지 한류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나단 파인 세계박물관 관장은 “‘책거리’를 보면 우리가 내린 결정이 보인다. 우리가 주변에 가지고 있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주위에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며 “이 전시회는 한국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과 의문, 취향, 변화와 전통을 탐색하는 기회”라고 말했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책거리는 유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유럽 왕실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국적인 기물을 수집해 전시하는 ‘분더카머(호기심의 방)’ 문화가 생겼다. 이 문화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청나라로 전파돼 다보격(多寶格·여러 보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이어졌고,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책을 중심으로 한 정물화인 책거리 그림으로 정착했다. 전시를 총괄한 정병모 한국민화학교 교장(경주대 겸임교수)은 “유럽 왕가의 수집 전통이 우리 식으로 이어진 예술인 책거리가 그 원류인 유럽으로 돌아가 열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했다. 전시는 11월 1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