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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미술 축제, 베네치아비엔날레 127년 역사상 가장 거센 여풍(女風)이 불어닥쳤다. ‘포스트 휴먼’이라는 올해 비엔날레 콘셉트를 집약해 보여주는 본전시(main exhibition)의 경우, 참여 작가 213명 중 188명이 여성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90%에 육박하는 수치로, 1895년 비엔날레 창설 이래 가장 극적인 성비 역전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올해 행사는 23일 공식 개막했다.
◇여성성에 기반한 초현실주의
이번 전시 주제를 쉽게 압축하면 ‘인류의 확장’으로 볼 수 있다. 괴물을 연상케하는 초현실주의적 존재를 즐겨 그린 여성 화가 리어노라 캐링턴(1917~2011)의 책 ‘The Milk of Dreams’에서 빌려온 전시 제목처럼, 기성의 상상력을 전복하는 ‘또 다른 존재’의 이미지를 통해 미래주의와 페미니즘 시각까지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영국 화가 엠마 탤벗(53)이 고갱의 동명 작품을 패러디해 대형 천막에 그린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처럼, 한 여자로 상정된 인류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어가는 일련의 대서사를 이룬다. 포르투갈 화가 파울라 레구(87)가 제작한 아이를 잡아 먹는 고도비만 여성 조각에서 보이듯 극도의 스트레스를 드러내는 전형적 작품부터,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미국 개념미술가 바버라 크루거(77)의 텍스트 이미지처럼 “Your Voice”를 유도하는 구호적 성격의 작품까지 아우른다.
한국 여성 설치미술가 정금형(42), 이미래(34)씨도 초청됐다. 정씨는 의료용 인체 모형과 로봇을 책상 위에 늘어놓은 SF적 설치작, 이씨는 짐승 내장처럼 내걸린 초벌 도자기 위로 유약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도록 설계한 으스스한 대형 신작 ‘끝없는 집’을 공개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이미래 작가는 올해 비엔날레 분위기에 대해 “여성 작가가 대부분인데다 공예풍의 작품이 많아 감성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말했다.
◇여성운동 선각자 소환해 恨풀이
이례적으로 참여 작가의 절반 가까운 88명이 사자(死者)다. 역사 속 인물, 주로 여성주의 주요 인물이 대거 포진해있다. 전시 콘셉트 강화를 위한 일종의 사료로서 소환된 것이다. ‘댄스 필름’ 창시자인 미국 실험영화 거장 마야 데렌(1917~1961)이나 생존 여성으로는 처음 루브르박물관에서 전시했던 우크라이나 출신 화가 소니아 들로네(1885~1979) 등의 작품이 그 증거다. 미술 작가가 아님에도 ‘페미니스트 선언문’ 썼던 시인 미나 로이(1882~1966) 등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채 눈 감은 이들을 소환한 탓에, 이 전시는 일종의 ‘한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총감독 체칠리아 알레마니(45)는 “역사의 변두리에 남겨진 여성 예술가 및 운동가를 등장시켜 비판적 반성의 출발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대립 넘어 자연의 보편성으로
그러나 공격적인 페미니즘 양상은 아니었다. 여풍의 역풍을 막기 위한 보편성 확보에도 신경을 쓴 모양새였다. 인간의 변화는 막을 수 없고, 이것은 성(性)을 뛰어넘는다. 전시장 상당 범위를 성인 어깨 높이까지 흙으로 채워 모성(母性)으로서의 대지를 표현한 콜롬비아 여성 작가 델시 모렐로스(55)의 설치작 ‘지상낙원’처럼, 인간은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변화를 거친다는 진리를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모든 갈등을 감싸안는 소재, 자연은 미술계의 대표적인 안전망이다. 삼라만상을 모조리 은유하기 때문이다. 수십평 전시장 전체를 하나의 숲으로 꾸며낸 미국 여성 작가 프레셔스 요코요몬(29)은 여러 외신에서 단연 화제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관람객은 작가가 조성한 이 실내 정원을 거닐며 제목 ‘세상이 끝나기 전 지구를 바라보기’를 실천하게 된다.
직전 행사였던 2019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방문객은 약 60만명이었다. 코로나 회복기를 감안해 올해도 비슷한 인파가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