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미술관 초대 관장이 된 미술가 이진준. 그는 “예술은 고정관념, 강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숙취에서 깨어난 아침, 갑자기 영감 솟구쳐 그림 그리는 시대는 끝났다. 공부 못해도 미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예술 하려면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은 기본, 과학기술까지 알아야 하는 세상이다.”

미술가인데 ‘공부’에 방점 찍는다. 한국 예술 풍토를 직격한다. 2023년 개관 예정인 카이스트미술관 초대 관장에 낙점된 이진준(48). 지난해 카이스트 50년 역사 최초로 미술가 출신 전임교수(문화기술대학원)로 임용된 인물이다.

예술계 전례 없는 ‘호화 스펙’의 소유자.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후 서울대 조소과 학부·대학원 졸업.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석사, 옥스퍼드대 인문학부 미술대학(러스킨 스쿨) 순수미술철학 박사. ‘경계 공간’을 다룬 박사 논문으로 작년엔 찰스 디킨스·스티븐 호킹 등이 거쳐 간 ‘영국 왕립예술학회’ 종신 석학 회원에 선정됐다.

한때 국내에서 촉망받는 미디어 작가였다. 서울 상암 DMC 상징 조형물인 12m 높이 미디어 조각 ‘THEY’(2010)가 그의 작품. 하지만 10년 전 국내 활동을 접고 영국으로 갔다. 이유는 공부였다.

이진준의 대표작인 서울 상암 DMC 상징 조형물 ‘THEY’(2010). 12m 높이 미디어 조각이다. /이진준 제공

-10년 만에 왜 한국으로 돌아왔나.

“AI 시대, 미래 예술은 공학·예술·인문학이 융합된 형태다. 그 실험을 하기에 공학 베이스가 탄탄한 카이스트가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카이스트와 미술. 언뜻 연결이 안 된다.

“임용되면서 ‘TX(Total Experience·총체적 경험) 랩’을 만들었다. 미국 ‘MIT 미디어랩’ 같은 곳이다. ‘경계 공간’에서 발생하는 기술과 생태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예술과 건축, 디자인을 융합해 연구한다.”

-예술의 개념이 어떻게 바뀌는 건가.

“이종격투기 시대가 되면서 복싱, 유도 등 특정 장르를 누가 잘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강한가’ 가리는 세상이 됐다. 동시대 예술도 그렇다. ‘누가 더 잘 그리냐’ ‘누가 더 잘 깎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미래 예술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중요해졌다. 한국은 여전히 예술을 기예(技藝)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영학도 출신 예술가. 특이하다.

“배운 지식과 에너지를 돈 버는 데에만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서울대 불교 동아리(‘선우회’) 활동을 했는데 선배 9명이 출가하는 사건이 있었다. 방황하다가 육체로 정진하는 조각에 이끌렸다. 김종영 조각가가 ‘지재불후(志在不朽·썩지 않는 곳에 뜻을 두라)’를 강조했듯 조각은 존재론적 고민을 던지는 예술이다.”

미대 졸업 후 1년간 방송국 교양 PD도 했다. “‘퓨처 오페라’라는 미디어 프로젝트를 하는데 경영학에서 배운 시스템, 방송국 부조정실에서 멀티채널 보고 편집했던 훈련이 모두 도움된다. 모든 경험이 하나도 버릴 게 없더라.”

이진준 카이스트미술관 초대 관장. / 김연정 객원기자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작가 등을 하며 주목받았다. 왜 떠났나.

“5년 정도 국내 예술계를 경험했다. 정치 문제 등 국내 이슈에 집중하고, 특정 매체에 천착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 방식으론 인류 보편을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를 풍성하게 하는 작가보단 새 나무(새로운 예술)를 심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서울대 미대, RCA, 옥스퍼드. 예술 최고봉을 섭렵했다. 뭐가 다르던가.

“학위 수집가 소리도 들었다(웃음). 비슷한 주제로 RCA 석사엔 2년, 옥스퍼드 박사엔 2년 반 걸렸는데 서울대 석사 따는 데 4년 걸렸다. 영상을 조각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는데 서울대 교수님이 ‘이건 조각이 아니다’고 하시더라. 그 교수님이 정년 퇴임하시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교수님께 고마운 부분이 있다. 당신의 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주신 덕에 내가 추구하는 세계와의 차이를 확실히 알게 됐다. 지금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다.”

-예술에서 공부가 왜 중요한가.

“영국에선 전교 1등이 옥스퍼드 미대에 원서를 쓴다. 예술이 인류학, 사학, 철학 모든 것을 아우르며 좌뇌와 우뇌를 함께 쓰는 행위로 이해된다. 지금 현대미술 최전선에는 히토 슈타이얼 같은 아티스트 스콜라(예술가 학자)가 있다. 한국엔 ‘공부하는 예술가’가 정말 드물다.”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온라이프' 에 출품된 이진준의 '그린 룸 가든'. 증강현실, AI 기술을 접목했다. /이진준 제공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고정관념, 강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지금은 미디어 매체가 인간 감각 경험을 극적으로 확장하는 시기다. 아예 다른 예술이 열리고 있다.”

-한국 예술계에 필요한 덕목이 뭘까.

“6·25 때 전쟁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단기 소대장’이 있었다. 한국은 예술가를 단기 소대장 기르듯 한다. 당장 쓸 수 있는 예술가를 만든다. 예술 선진국에선 속도는 느리지만 ‘장군’을 길러낸다. 우리도 여유 갖고 거장을 길러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