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이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이대원의 그림 ‘사과나무’를 배경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화가 말년의 걸작으로 가로 길이만 5m가 넘는 압도적 규모를 자랑한다. /뉴시스

값비싼 취미,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니다.

국내 대표적 미술품 컬렉터 안병광(65) 유니온약품 회장은 제약사 영업맨 시절부터 그림을 사모았다. 심성이 메마르지 않으려면 좋은 취미가 있어야 한다는 상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한달치 월급 20만원을 주고 산 금추 이남호의 그림을 시작으로, 도상봉·이중섭·천경자·이우환 등 최고 수준의 한국 미술 컬렉션을 완성해나갔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에 역사적인 우리 그림을 걸 수 있다는 기쁨이야말로 40년 넘게 그림을 사 모을 수 있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그가 설립한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았다. 수집벽으로 채운 보고(寶庫)다. 엄선한 소장품 140점을 선보이는 10주년 특별전도 9월 18일까지 열린다. 컬렉터의 소신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를테면 김환기의 ‘십만개의 점(04-VI-73 #316)’은 값이 100억원을 넘어간다. “가치만 있다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산다는 의지였지만 100억원은 쉽게 투자할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저 그림이 외국에 나가버린다면 영영….” 결국 애지중지하던 소장품 6점을 처분해 돈을 마련했다. 모네 그림 1점, 이중섭 그림 3점, 로버트 인디애나 조각 1점, 그리고 김환기의 다른 그림 1점. “내 손으로 작품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과 향유하고 싶었다.” 서울미술관은 최근 누적 관람객 100만명을 넘겼다.

2010년 경매에서 어렵사리 38억원에 손에 넣은 이중섭 1953년작 '황소'(35.5x52㎝). /서울미술관
200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처음 보자마자 모친이 떠올라 구매한 박수근 1958년 연필 드로잉 '젖 먹이는 아내'(73x51㎝). /서울미술관
2005년 닭띠해 조선일보 신년 기사에 실린 이응노 1960년작 '수탉'(140x70㎝). 이 그림에 꽂혀 반년간 수소문한 끝에 결국 소장에 성공했다. /서울미술관

그림은 대개 추억의 영물(靈物)이다. 숱한 명품 사이에서 그가 가장 뭉클한 그림은 박수근이 연필로 그린 ‘젖 먹이는 아내’다. 보자마자 모친이 생각났다. 엄혹했던 1998년 IMF 당시에도 그는 그림을 샀다. 화가 김기창이 6·25전쟁 도중 한국화(畵)로 각색해 그린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이 시장에 나왔다. 빌딩 두 채 값이었다. 전부 샀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그리지만 우리 전통에 맞게 예수의 사랑을 전파한 건 김기창뿐이다.”

2005년 닭띠해 조선일보 신년 기사에 실린 이응노의 1960년 수묵화 ‘수탉’을 보고는 그 당당함에 매료돼 6개월을 수소문해 결국 손에 넣었고, 2019년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한글 특별전 ‘ㄱ의 순간’에 출품된 이건용의 신체 회화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술시장 활황을 틈타 몇 푼의 차액 실현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늘고 있지만 그는 반대다. 수 년 전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경합해 단색화 거장 정상화 그림 두 점을 구매했다. “얼마 전 뉴욕현대미술관이 그림을 팔라며 당시 값의 2배를 불렀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이런 대작은 또 구하기 어렵다.”

‘이건희 컬렉션’ 열기 등으로 여느 때보다 수집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지만, 한국에서 기업인이 그림 좋아하는 건 여전히 위험한 일이다. 그 역시 수 년간 세무 조사를 받았다. “아직도 그림 산다고 하면 리베이트 취급하더라”며 “컬렉터를 존중하지 않으면 문화 강국은 요원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