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아이에게 그림은 수화(手話)였다. “늘 고립된 인간이라고 느껴왔다. 내향적이고 말주변도 없었다. 그래서 그렸다. 종이 위에 내 안의 나를 끌어냈다.” 미국 출신 세계적 영화감독 팀 버튼(64)이 본지 단독 인터뷰에서 말했다. 몽환적이고 기괴한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인 그의 그림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에서 9월 12일까지 전시된다. 어릴적 드로잉 노트부터 그림·조각·사진 등 50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그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며 ‘나도 그리고 싶다’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왜 하필 그림이었나?
“물론 글을 쓰거나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노래는 듣지 않는 게 좋을 거다(웃음). 원래 아이들이 낙서를 좋아하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걸 했고, 내 방식으로 창의성을 풀어냈다. 대부분 커가면서 그림의 감정을 잃어버린다. 잘 그리니까 그려야지, 이게 아니다. 좋으니까 그리는 것이다.”
-감독과 화가, 둘은 어떻게 다른가?
“영화는 팀으로, 그림은 혼자 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정서는 동일하다. 나는 별개가 아니라 총합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달할 수 있는 건 결국 ‘연결’인 것 같다. 내 시작과 현재가 내 창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팀 버튼은 “상상력의 원천은 유년 시절의 외로움”이라고 말했다. “외로움이 DNA처럼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도 했다. 고독한 소년은 스스로를 괴물과 동일시했다. 창백하고, 몸 전반에 바느질 자국이 있고, 이 세상에 없는 존재로 표현되는 자들. 그의 영화가 그렇듯 그림 속 ‘굴 소년’이나 ‘외계인’ ‘해적’ ‘녹색인간’ 등은 무섭다기보다 그 외향으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가장 당신과 닮았나?
“‘가위손’의 에드워드, ‘크리스마스 악몽’의 해골 주인공 잭 스켈링턴. 종잡을 수 없지만 가장 순수한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캐릭터는 내게서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배트맨’은 이미 이미지가 구축돼 있었지만, 얘네들은 내 안에서 끄집어 낸 캐릭터다.”
-언제 어디서 그리나?
“작업실에서, 작은 바(Bar) 혹은 식당에서, 심지어 냅킨 위에도 그린다. 뭘 그려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둠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퍼스널 세러피(personal therapy)다.”
냅킨에 그린 수십 점의 군상(群像)을 비롯해, 전시장에는 몬스터 천지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이들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대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린애들이 진짜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는가? 취한 채 돌아와 집을 박살내 버리는 가족이나 친척이다. 괴물이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커버린 진짜 괴물이 되지 말자고 그는 초지일관 웅변한다.
-지금의 당신은 어떤가?
“나이 들면 이것도 본 거고 저것도 본 거고… 흥미가 사라진다. 꼭 아이로 남을 필요는 없지만, 세상 모든 게 새로웠던 시선만큼은 예술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가끔 핸드폰에서 벗어나 창문을 열고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중요한 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서적으로 가장 생산적일 수 있다.”
-찬사와 혹평을 오가는데.
“운 좋게도 첫 영화부터 그랬다. ‘비틀쥬스’는 최악의 영화 10선에도 꼽힌 적이 있다. 그래서 익숙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주 초창기부터 모두의 취향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성공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게 삶이다.”
이번 월드투어 전시 첫 장소가 한국이다. 10년 전 열린 서울 개인전을 위해 방한했을 당시 먹었던 광장시장 빈대떡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들렀다. “이 거대한 팬케이크야말로 내가 지금껏 이룬 최고의 성취”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팀 버튼은 전시장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을 만났다. “계속 그리렴(Keep drawing)” 외치자, 아이들이 “예!”라고 답했다.